예술이 인류를 구원하리라
그대의 사상과 감정 뒤에, 나의 형제여, 강한 명령자, 알려지지 않은 현자가 있다. 그것이 자기라고 일컬어진다. 그것은 그대의 몸속에 살고, 그것은 그대의 몸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고골의 단편소설 ‘외투’를 읽었다.
주인공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근면 성실한 만년 9등관 공무원이다. 8등관부터는 귀족 대접을 받고 세습이 된다고 한다.
그는 연줄도 없고 능력도 없어 8등관에 오를 희망이 전혀 없는 만년 하급직 공무원이었다.
그는 추위가 닥치자 해진 외투를 수선하러 간다. 재봉사는 외투가 너무 낡아 더 이상 기울 수 없다며 새 외투를 맞춰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지난 1년간 근검절약해서 모아두었던 돈과 상여금 덕에 새 외투를 장만한다. 하지만 축하 파티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강도를 만나 새 외투를 빼앗기고 만다.
그는 경찰서에 찾아가 고발하고 유력인사에게 간청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절망에 빠진 아카키예비치는 편도선염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가 죽은 후 유령이 나타나 사람들의 외투를 빼앗아 가기 시작한다. 유령은 아카키예비치의 청원을 거절했던 관리의 외투를 빼앗은 뒤 사라진다.
옷은 인간에게 존재 증명의 상징이다. 과거 봉건 시대에는 신분에 맞게 옷을 입었다.
이제 민주주의 사회가 되어 아무도 어떤 옷을 입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옷이 신분(존재)의 상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만년 하급직 공무원 아카키예비치에게 새로 장만한 외투는 그의 전존재다. 그는 외투를 잃어버리자 삶의 의욕을 완전히 잃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옷에 대해 해방될 수 있다면, 우리는 완전한 대자유(大自由)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한국 근대 최고의 선승 경허 선사는 천장암에 모시고 있던 늙은 어머님이 생신을 맞은 날, 어머니를 위해 특별 법회를 열었다.
많은 불자들이 법문을 듣기 위해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는데, 경허 선사는 옷고름을 풀고 알몸을 드러냈다.
대중이 놀라 달아나고 경허 선사의 어머니는 한탄을 했다. “경허가 실성을 했구나! 세상에 이런 망측한 짓을 내 앞에서 하다니!”
경허 선사는 다시 옷을 입은 뒤, 주장자를 세 번 내리치고는 다음과 같이 법문을 했다.
“어머니는 내가 어릴 적에 나를 벌거벗겨 씻기며 귀엽다 예쁘다 하셨소. 어머니와 자식 사이는 변함이 없음에도 어머니는 오늘 벌거벗은 내 몸을 보시고 망측하다 해괴하다 하셨소. 바로 이것이 사람의 마음이요. 부모자식 간에도 이러한데 하물며 남남인 부부 사이며 친구 사이며 이웃 사이는 일러 무엇하리요. 이 마음을 닦지 아니하고 이 마음을 다스리지 아니하면 독사가 되고, 마귀가 될 것이오!”
마음을 닦고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마귀가 되어 있는 마음을 원래의 마음, 본성(本性)으로 되돌리는 것을 말한다.
이 본성을 경허 선사는 알몸이 됨으로써 대중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달아난 대중들은 ‘자신들의 마귀’에서 달아났던 것이다.
니체는 말한다. “그대의 사상과 감정 뒤에, 나의 형제여, 강한 명령자, 알려지지 않은 현자가 있다. 그것이 자기라고 일컬어진다. 그것은 그대의 몸속에 살고, 그것은 그대의 몸이다.”
우리의 몸 자체가 참나, 자기(自己, self)다. 우주와 하나인 마음이다. 신성(神性), 그 자체다.
경허 선사는 자신의 몸을 통해 온전한 자신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대중은 승복을 입은 경허 선사 외의 경허 선사는 볼 수가 없었다.
이제 사람들은 알몸이 될 수가 없다. 목욕탕에서 옷을 벗고 나체가 되지만, 그건 알몸이 아니다.
목욕하는 몸이다. 우리는 서로의 벌거벗은 몸을 탐한다. 하지만 그건 알몸이 아니다.
성욕 덩어리가 되어 있는 몸이다. 해와 달과 나무를 보듯이 우리가 알몸을 볼 수 있을까?
일본의 한 행위 예술가는 조용히 무대에 앉아 관람객들에게 가위를 나눠주고서 자신의 옷을 자르게 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관음증에 취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위질이라는 의례를 행하며 차츰 마음이 정화되어 갔을 것이다.
사람들은 행위 예술가의 알몸이 드러나자 경탄했을 것이다. 속으로 경배를 했을 것이다.
현대에는 과거 종교가 했던 구원의 역할을 예술이 대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대예술이 굳어 있는 사고로는 이해하기 힘든 이유다.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 작가 프란츠 카프카가 말하는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가 현대예술인 것이다.
경허 선사의 일생은 긴 행위예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삶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공연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