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을 넘어서

by 고석근

선과 악을 넘어서


대립에 관한 습관. 자연에 대립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정도의 차이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도처에서 대립(예컨대 ‘덥다’, ‘차갑다’와 같은)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정확하게 관찰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쁜 버릇은 우리를 더욱더 부추겨서 이번에는 내면의 자연, 즉 정신적, 도덕적인 세계까지도 이 대립 속에서 이해하고 분석하도록 했다. 따라서 변화가 아니라 대립이 있다고 믿음으로써 허다한 고통, 교만, 가혹성, 배반, 냉혹함 따위가 인간의 심성 속으로 스며들었다.


-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고골의 희곡 ‘검찰관’을 읽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러시아의 한 소도시에 암행 검찰관이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시장을 비롯한 각급 기관장들, 지역 유지들은 안절부절 못했다. 그들은 여관에 묵고 있던 하급 관리 흘레스타코프를 검찰관으로 착각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비리를 감추기 위해 홀레스타코프에게 뇌물을 주고 연회까지 베풀어 준다. 홀레스타코프는 시장의 딸과 약혼을 하게 되고, 시장 집은 축제 분위기가 된다.

홀레스타코프가 백부에게 다녀오겠다며 유유히 떠난 후, 다들 가짜 검찰관의 정체를 알아채고는 경악하고 있을 때, 진짜 감찰관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이 희곡의 서두에 속담 하나가 소개되고 있다. ‘제 낯짝 비뚤어진 줄 모르고 거울만 탓한다.’


고골은 이 속담을 통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이치를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실제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물체의 거울이 아니라 마음의 거울이라면 어떻게 될까? ‘나는 저 앞에 걸어가는 사람이 싫어!’


저 사람은 누구인가? 자신의 모습이다. 자신이 싫어하는, 속에 꼭꼭 숨겨 놓은 자신의 모습이 저 사람에게 투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저 사람이 문제야!’ 다들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망상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세상을 두 개로 나눠서 보게 된다.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 귀한 것과 천한 것... .


우리는 어느 한쪽을 택하면서, 다른 반쪽을 거부하게 된다. 자신의 마음이 점점 줄어든다.


우리는 우글쭈글 찌그러진 작은 마음으로 살아가게 된다. 세상은 무시무시한 정글로 변하게 된다.


언제 우리가 “내가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들은 다 나 자신의 모습이야!”하고 깨닫게 될까?


바로 ‘트릭스터(Trickster)’를 만났을 때다. 트릭스터는 심층심리학자 칼 융이 말하는 우리의 집단무의식에 있는 ‘원형(archetype)’이다.


트릭스터는 신화, 민담 등에서 신과 자연계의 질서를 파괴하고 장난을 좋아하는 장난꾸러기이다.


선과 악, 창조와 파괴, 현자와 바보 같은 완전히 다른 양면성을 겸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노자가 말한 도(道)가 장난꾸러기의 형상을 하고 나타나는 것이다. 허풍쟁이 홀레스타코프가 바로 트릭스터다.


그에 의해 러시아의 한 소도시의 질서가 한순간에 무너진다. 이러한 파괴는 엄숙한 현자에 의해서는 이루어지기 힘들다.


니콜라이 고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단 몇 분 혹은 한순간일지라도, 인생에서 누구나 한 번은 홀레스타코프가 된다. 살아가면서 한 번도 홀레스타코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말재주가 좋은 근위 사관도, 죄 많은 우리 작가들도 때로는 홀레스타코프가 된다.”


트릭스터는 우리나라에서 도깨비로 나타난다. 도깨비는 가끔 사람들에게 길을 잃게 한다. 한순간에 그는 혼돈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는 어떻게 될까? 도깨비는 사악하지 않다, 장난기가 좀 심할 뿐이다. 그는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길을 찾아가게 된다.


그는 길을 잃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망연자실했지만, 그는 자신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그는 그 짧은 순간에, 자신의 인생의 길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전보다 훨씬 현명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왕의 곁에는 트릭스터, 광대가 있었다. 그는 선, 창조, 현자 같은 좋은 것만 생각해야 하는 왕에게 악, 파괴, 바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왕은 광대를 통해 균형 잡힌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좋은 생각은 나쁜 생각과 더불어 오기 때문이다.


우리도 가끔 우리 안의 트릭스터를 만나야 한다. 장난기가 올라올 때, 아이처럼 마냥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한다.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다른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힘이 생겨난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선과 악이 만나고, 창조와 파괴가 만나고, 현자와 바보가 만나야 한다. 그 둘이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선과 창조를 행하는 현자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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