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by 고석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나는 그대들에게 세 가지 변화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어떻게 사자가 되며 마지막으로 사자가 어떻게 어린 아이가 되는가를.


-니체,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덴마크의 동화 작가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숭이 임금님’에서 한 아이가 소리친다. “임금님은 벌거숭이다!”

니체는 이렇게 눈에 보이는 대로 말할 수 있는 인간, 아이를 최고의 인간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런 아이를 잃어버려 낙타로 살아간다.


등에 잔뜩 짐을 지고 사막을 뚜벅 뚜벅 걸어간다. 그는 짐의 무게에 짓눌려 땅에서 떨어질 수가 없다.


잠시 허공에 발을 뻗는 순간, 환희에 젖지만, 그는 다시 짐의 무게에 눌려 발을 땅에 내딛는다.


이 낙타에서 벗어나려면 등에 진 짐을 벗어던져야 한다. 홀가분해 진 몸은 천지사방을 향해 마구 소리치게 된다.


자유! 그는 온전한 자유, 사자가 된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다시 짐을 찾게 된다. 허공에 붕붕 뜨는 몸이 두려운 것이다.


사자가 되었다가 다시 낙타가 되는 인간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이것을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 했다.


임금님이 벌거숭이라는 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 대신들은 두렵다. 임금님이 벌거숭이라면, 자신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관복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임금님의 몸에 걸친 옷이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눈부시게 빛나는 용포가 하늘거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땅에 굳건히 발을 내딛고 살아가게 된다.


짐의 무게에 의해 이 땅 위를 살아가는 인간, 그는 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가 없다. 이러한 삶의 태도를 체코의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 ‘키치’라고 말한다.


키치는 19세기 중반 서양에서 상업화가 진행되면서 등장한 신흥 중산층이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귀족만이 갖고 있던 예술품을 이제 중산층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왜 중산층이 예술품을 갖고 싶어 했을까?

‘삶의 의미’ 때문이다. 그들이 조악한 예술품이라도 갖게 되면, 자신들의 취향(아비투스)이 귀족들과 같아지는 것이다.


그들이 예술품을 보고 있을 때, 그들은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 것인가? 이런 사고방식이 널리널리 퍼지게 된다.


세상이 요지경이 된다. 이제 아무것도 손으로 잡을 수가 없다. 잡으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보기만 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은 쇼윈도 속의 마네킹이 된다. 이 세상 전체가 신기루가 된다.


시골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자고 몇 사람이 돈을 모았다. 땅을 사고 집을 지으려 하자 갑자기 땅이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밀란 쿤데라는 키치를 ‘똥(가벼움, 의미 없는 것)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라고 말했다.


인간이 되려면 동물과 달라야 한다. 어떻게 동물처럼 똥을 눈단 말인가? 똥을 입에 올리는 것은 금기가 된다.

아이들은 똥 얘기를 하며 어른들의 위선을 조롱한다. 어른들은 사방이 막힌 화장실에서 똥을 눌 때 비로소 깊은 평온을 느낀다.


스탈린의 아들 야코프는 포로수용소에서 똥 때문에 비난을 받게 되자 수용소 담장의 고압 철조망에 몸을 던졌다.


신의 아들이 어떻게 똥에 의해 더럽혀질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치욕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밀란 쿤데라는 “키치란 존재와 망각 사이에 있는 환승역이고 인간은 살아있는 한 키치적(무거움, 의미 추구)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존재와 망각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존재는 아이다. 아이는 망각함으로써 존재 자체를 지워버린다. 그래서 아이는 최고의 인간이다.


우리 대다수는 낙타다. 바로 아이가 될 수는 없다. 먼저 사자가 되어야 한다. 등에 진 짐을 다 벗어던지고 포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 우리 안의 정신이 천지자연의 파동과 하나가 된다. 과거의 모든 것을 잊게 된다.


오로지 한 자락 춤이 된다. 아이가 되지 못하는 인간은 ‘키치적일 수밖에 없다.’ 의미 없는 삶을 어른이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무언가에 중독되어 살아야 한다. ‘옛날에 나도 한때는... .’ 항상 환상에 젖어야 한다. 무료한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항상 다른 곳을 본다.


어느 선사가 말했다. “똥 눌 때 정신을 차려라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똥을 갖고 논다.


똥 눌 때마다 정신을 바짝 차리면 우리는 아이의 마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알아차림 명상을 우리는 쉼 없이 해야 할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인간은 죽기 전 키치, 삶의 의미에서 벗어나지만 묘비명을 만들어 자신들을 다시 하나의 키치로 만들어버린다”고 말한다.


스스로를 키치, 하찮은 모조품, 저급한 것, 싸구려로 만드는 인간, 그래서 불교에서는 “절벽에서 손을 놓으라!”고 말한다.


그때 우리는 ‘참을 수 있는 존재의 가벼움’이 될 것이다. 물 위를 걸은 예수처럼, 갈잎을 타고 양자강을 건넌 달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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