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삶이다
인간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데에 있어서 내가 택한 방식은 운명애이다. 앞을 향해서도 뒤를 향해서도 모든 영원에 걸쳐서 하나도 변경을 요구하지 않는 일. 필연적으로 닥쳐오는 일을 은폐하지 않고 견딜 뿐 아니라 사랑하는 일.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체코의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산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지나고 보면 누구나 한평생이 쏜살같이 지나가버렸다.
인간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천년, 만년을 산다고 해도 지나고 보면, ‘순간’으로 와 닿을 것이다.
시간은 오로지 ‘현재’밖에 없기 때문이다. 과거는 기억일 뿐이고, 미래는 오지 않은 시간이다.
현재에 살고 있던 유인원이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인간)’로 진화하면서 ‘시간’이라는 개념을 갖게 되었다.
인간은 이 세상을 ‘언어(개념)’로 인식한다. 언어가 없으면, 인간은 생각하지 못한다.
우리가 언어를 잊고 깊은 명상에 들어가면, 텅 빈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시간도 공간도 없다.
독일의 아동문학가 미하엘 엔데의 동화 ‘모모’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시간은 삶이며, 삶은 가슴 속에 깃들여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을 아끼면 아낄수록 가진 것이 점점 줄어들었다.’
우리가 ‘시간을 아껴 쓰자’고 생각하게 된 것은 산업사회 이후다. 근대의 산업사회에서는 시간은 돈이다.
공장에서는 시간을 들일수록 생산량이 늘어난다. 농업사회에서는 아무리 오랜 시간 일을 해도 생산량에 한계가 있다.
따라서 농업사회에서는 시간은 삶이었다. 천지자연과 하나로 어우러지는 자연 그 자체였다.
그러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시간을 아껴 쓰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을 아낄수록 가진 것이 점점 줄어들었다.’
화살 같이 흐르는 시간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현재’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의 삶’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카르페 디엠(현재를 잡아라)’이 되면, ‘지금 여기의 삶’이 너무나 풍부해진다. 자신과 천지자연이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이 찰나, 이 순간, 현재에 머물 수 있으려면, 과거에서 현재를 지나 미래로 흐르는 직선의 시간에서 탈출해야 한다.
이 시간의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의 사고체계가 바뀌어야 한다. 먼저 편하게 살아가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니체는 위대하게 살아가려면, “필연적으로 닥쳐오는 일을 은폐하지 않고 견딜 뿐 아니라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의 위대한 사상, 운명애(運命愛, 아모르파티)다. 운명을 사랑하게 되면, 커다란 고통들을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그 고통들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되면, 고통이 큰 만큼 큰 기쁨이 온다. 우리의 온몸이 깨어난다.
우리는 온몸으로 살아가게 된다. 온몸 그 자체가 우리의 영혼이다. 완전한 영적인 삶이 된다.
그리스의 시간의 신은 크로노스다. 우리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직선의 시간이다.
이 시간은 절대적인 시간이다. 이 세상 어디에나 같은 시간이 흐른다고 생각하는 시간이다.
이 생각이 틀린다는 것을 20세기 최고의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증명했다. 시간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흘러간다.
상대적인 시간이다. 그리스의 또 다른 시간의 신, 카이로스다. 우리는 지금 같은 시간에 있는가?
보는 사람마다 다 다르다. 이 우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있다면, 시간은 보는 사람에 따라 엄청나게 다르게 흘러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찰나가 영원’이 된다. 지금 여기의 삶이 영원이 되는 게 과학적인 생각이다.
우리가 직선의 시간이라는 망상에서 벗어나 매순간, 우리의 한 세계를 탄생시킬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눈부시게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