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범을 찾아서
인생을 사랑한다는 것은 오래 사는 것을 바라는 것과는 거의 정반대의 것이다. 모든 사랑은 ‘순간’과 ‘영원’을 생각한다. 그러나 인생의 ‘길이’를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디선가 표범 사진을 찍는 사진작가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는 하얗게 눈 덮인 히말라야 산으로 올라간단다.
그는 눈 속에서 카메라를 들고 며칠이고 표범을 기다린다고 한다. 그는 표범에게서 ‘가장 멋진 인간상’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
표범은 히말라야 산의 왕이다. 왕의 걸음걸이는 항상 의젓하다.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다.
모든 것이 그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니까. 예수가 말한 ‘두드려라 열릴 것이요, 구하라 찾을 것이다.’는 히말라야 산의 표범에게 해당하는 진리다.
그럼 인간은 어떤가? 표범 같은 왕인가? 인간 세상에는 왕이 없어진지 오래다. 대신 모든 사람이 왕이 되었다.
현대는 민주주의(民主主義) 사회다. 민(民)이 주(主)인 사회체제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주인(主人)이라고 생각할까?
히말라야에 오르는 사진작가는 주가 되어 있는 인간의 눈빛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 길을 가다, 혹은 버스 안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들의 눈빛은 항상 불안해 보인다.
중국의 임제 선사는 주인으로 살아가는 인간을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고 했다. 위(位)가 없는 참된 인간이다.
히말라야 산에서 살아가는 표범은 위(位)가 아예 없을 것이다. 진정한 왕은 자신이 왕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임제 선사는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고 했다.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라. 그러면 지금 있는 그 곳이 바로 진리의 세계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삼라만상이 자신과 별개로 이 세상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눈에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밖에 보이는 풍경은 자신의 마음이 지어낸 것이다.
양자물리학에서 말하는 ‘관찰자 효과’다. 서양 철학사에 큰 획을 그은 임마누엘 칸트는 우리 마음에 생각의 틀, 범주가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 범주에 의해 세상을 인식한다. 주인은 주인의 범주가 있고, 노예는 노예의 범주가 있다.
주인의 마음으로 자신과 이 세상을 바라보면, 니체처럼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인생을 사랑한다는 것은 오래 사는 것을 바라는 것과는 거의 정반대의 것이다. 모든 사랑은 ‘순간’과 ‘영원’을 생각한다. 그러나 인생의 ‘길이’를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노예는 ‘이 순간’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이 순간이 얼른 지나가기를 바라거나 좀 더 오래 있기를 바라게 된다.
주인은 언제 어디서나 이 순간을 누린다. 맹자가 말하는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충만하기에, 이 순간은 언제나 영원이 된다.
노예는 항상 이 순간이 충만하지 않기에, 자꾸만 인생의 길이를 생각하게 된다. 그는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게 된다.
언제나 이 순간이 단 한번이라고 생각하는 노예는 인생이 허망해진다. 인생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이 된다.
사기를 쓴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는다.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죽음의 무게를 정한다는 것이다. 주인과 노예는 죽음을 대하는 방향이 확연히 다르다.
매순간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주인은 죽음의 순간에도 충실하게 될 것이다. 매순간이 영원이었으니, 죽음의 순간도 영원이 될 것이다.
노예는 죽음 앞에서도 삶에 대한 미련이 클 것이다. 실컷 살지 못했으니 도저히 떠날 수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