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인간을 위하여
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다.
- 탈무드 Talmud (유태교의 경전)
오래 전에 ㅈ 문학상 시상식이 열리는 ㄱ 신문사에 심사위원 자격으로 간 적이 있다.
서울역에서 전철을 내려 길을 가다가 한 노숙자와 눈이 마주쳤다. ‘헉!’ 그 휑한 눈동자를 보며 가슴이 아려왔다.
‘ㅈ 문학상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제정하였는데, 나는 저 노숙자의 눈빛을 외면하며 길을 가는구나!’
언젠가부터 역전에 노숙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사람들’이었다.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으로 현대정치를 분석한다.
호모 사케르는 ‘벌거벗은 자’를 말한다. 육체적 생명은 있으되 사회적 생명이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노숙자는 엄연히 생명은 있으나, 사회에서는 전혀 존재감이 없다. 사람들은 그를 ‘이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대한다.
아감벤은 현대사회는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호모 사케르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노숙자와 옛날의 거지는 어떻게 다른가?
옛날의 거지는 한 사회의 일원이었다. 거지가 어느 날 불쑥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또 왔네’하고 노래하며 나타나면 우리는 그를 사람으로 맞이해준다.
그런데 왜 지금은 그들의 후예들을 인간 취급하지 않는 걸까?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의 공동체 속에서 살았다.
장애인들도 더불어 살았다. 하지만 산업사회가 등장하며, 산업사회의 공장에서 제대로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은 ‘정상적인 인간’ 바깥에 두게 되었다.
그들은 정신병원을 위시한 여러 특수 시설에 갇혀 살게 되었다. 일할 수 있는 데도 일하지 않는 인간들(노숙자)은 아예 인간 취급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야 일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일을 할 테니까. ‘언제 직장에서 떨어져 나가게 될지 몰라!’
우리는 실업자가 되면 스스로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들 알아서 자기계발을 열심히 하며 산업사회의 성실한 일꾼이 되어갔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동의를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자.
모든 사람이 근면 성실하게 일해야 하는지. 일하는 인간만이 인간답게 보이는 게 정말 인간다운 생각인지.
개미들을 보면, 밖에서 볼 때는 다들 열심히 일하는 것 같아도, 굴 안에서는 빈둥거리며 노는 개미들이 약 30% 정도 된다고 한다.
이 개미들은 ‘위기 대응팀’이라고 한다. 언제 어떤 위기라 올지 모르는 게 생명체들의 삶이다.
어느 날 갑자기 개미 사회에 심각한 위기가 닥치면, 일하는 몸으로 길들여진 개미들은 제대로 대응 하지 못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놀고 있던 개미들은 어떤 몸으로 길들여지지 않았기에 쉽게 위기에 대응하는 몸으로 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사회도 이렇지 않을까?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노숙자들은 ‘인류 위기 대응팀’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대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잉여인간으로 지탄받는 많은 사람들을 새로운 눈으로 봐야 할 것이다.
잉여인간, 인간실격... 이런 단어들은 일하는 인간으로 길들여진, 가축이 되어버린 인간들의 착시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ㅈ 문학상에 잉여인간 예찬의 글이 많이 투고되었으면 좋겠다. 잉여인간들이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부분
진화론에서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이라고 한다.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을 강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시인은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는 말에 ‘자신이 미워졌다.’ 인간은 개인이면서 인류의 일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