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의 삶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면 인생의 모든 법칙이 변할 것이다. 고독해도 더 이상 외롭지 않고, 빈곤해도 더 이상 가난하지 않으며, 연약해도 더 이상 약하지 않을 것이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Henry David Thoreau (1817-1862, 미국의 시인)
한 선사가 대중들에게 화두를 주었다.
“똥 눌 때 정신을 차려라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똥 눌 때 온정신을 집중한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늘 좋은 일어나는가 보다.
어른들은 똥 눌 때, 정신을 집중하지 못한다. 얼른 똥을 누고 다음에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가끔 어른들도 화장실에 들어가 아이가 될 때가 있다. 혼자 똥을 누며 아이처럼 마냥 즐거워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이내,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똥은 더러운 거니까. 더러운 행위를 했으니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하니까.
똥 눌 때 정신을 차리게 되면, 똥이 더 이상 더럽지 않게 된다. 온몸이 배설의 기쁨으로 충만해지기 때문이다.
오로지 ‘쾌’만 남기 때문이다. 생명체는 원초적으로 쾌를 좋아하고 불쾌를 싫어한다.
방금 태어난 송아지는 풀밭으로 가서 풀을 뜯어 먹는다. 용케도 독초를 피해간다. 독초 가까이 가면 불쾌감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도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 쾌는 좋아하고 불쾌는 싫어하기!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이렇게 살지 않는다.
쾌와 불쾌의 자리에 선과 악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똥은 더러워! 해로운 균들이 득시글거려!
이렇게 한번 낙인이 찍히면, 그걸로 끝장이다. 똥은 악이 된다. 가까이 하지 말아야할 절대 악이 되어 버린다.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렇게 보인다. 사람은 ‘마음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현대 철학의 아버지 니체는 쾌와 불쾌로 살아가는 사람을 주인이라고 하고, 선과 악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노예라고 했다.
주인은 아침에 눈을 뜨면 생각한다. ‘오늘 하루 무엇을 하며 즐겁게 보낼까?’ 그는 쾌를 찾아간다.
노예는 아침에 눈을 뜨면 생각한다. ‘오늘 하루도 주인을 잘 모셔야지!’ 그는 선을 찾아간다.
똥 눌 때마다 정신을 차리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쾌를 찾아가는 사람이 될 것이다.
노예의 도덕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묻는다. “사람들이 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아가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됩니까?”
주인으로 살아보지 못한 사람은, 주인의 명령이 없으면 안절부절 못한다. 자신도 모르게 짐승이 된다.
갑자기 전기가 나간 도시가 무법천지가 된다. 흔히 이런 세상을 정글에 비유하는데, 정글에는 얼마나 아름다운 질서가 있는가?
거기에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이 아니라 서로의 살(肉)을 나누며 살아가는 숭고한 생명체들이 있다.
주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삶의 법칙을 스스로 정하며 살아가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짐승으로 퇴화하지 않는다.
사람은 짐승에서 진화하면서 다른 존재들과 공감하는 힘이 생겨났다. 삶의 주인들이 모여 살아가는 세상에는 깊은 평화와 사랑이 깃들게 된다.
바람은 나의 얼굴을 스쳐가리라.
아, 말도 하지 않고 생각도 하지 않으리
그래도 한없는 사랑은 영혼에서 솟아나리니
나는 이제 떠나리라. 방랑객처럼
연인을 데리고 가듯 행복에 겨워, 자연 속으로.
- 아르튀르 랭보, <감각> 부분
시인은 바람 따라 아프리카 초원까지 걸어갔다고 한다.
그는 ‘감각’이 다 열리는 체험을 한다.
바람이 얼굴을 스쳐가며 말과 생각이 사라지고, 한없는 사랑이 영혼에서 솟아나온다.
그의 안에서 연인(아니마, 내면의 여인)이 깨어나 함께 행복에 겨워, 자연 속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