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무겁다
희망이란 원래부터 있는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다.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길이 된다.
- 루쉰 魯迅 (1881-1936, 중국의 소설가)
헝가리 출신의 철학자 게오르크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의 첫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우리는 오랫동안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를 살아왔다. 그러다보니 하늘의 별이 잘 보이지 않는 이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늘의 별을 보고 길을 가고 싶어 한다.
사이비 종교가 창궐하는 이유다. 나도 오랫동안 하늘의 희미한 별빛을 따라 길을 갔다.
나를 스스로 ‘빈농의 장남’으로 규정하고, 나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했다.
30대 중반에 문득 길이 끊어졌다. 별빛이 사라진 것이다. 앞에는 천 길 낭떠러지가 있는 듯했다.
나는 나를 짓누르던 어깨의 짐들을 다 던져 버렸다. 홀가분해진 몸은 날 듯이 가벼워졌다.
나도 모르게 허공으로 솟아올라가는 나의 몸은 원하는 곳이면 어디나 갈 수 있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항상 느낀다. ‘나는 내가 무겁다.’ 그 이유는 등에 너무나 무거운 짐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등에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한, 우리는 자신의 무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과거 봉건사회에서는 인간은 태어나면서 ‘의무’를 부여받았다. 왕족은 왕족의 길을 가야 했고, 귀족은 귀족의 길을 가야 했고, 노예는 노예의 길을 가야 했다.
이 오랜 습관이 우리에게 남아, 민주주의사회가 된 지금에서도 스스로 자신에게 의무를 부여하려고 한다.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 한다. 인간은 자유(自由)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자신(自)에게서 나와야(由) 한다.
스스로 삶의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 인간은 자신을 창조할 때 가장 기쁘다. 창조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오랫동안 의무에 짓눌려 살아온 습(習)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솟아나오는 것’으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 안에는 천지자연을 운행하게 하는 근원적인 에너지가 있다.
이 에너지가 흐르는 곳으로 가야 한다. 밖에서 길을 찾지 말아야 한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힘, 해가 지고 밤이 오는 힘... 이 힘이 우리를 살아가게 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아이처럼 즐거워진다. 니체가 말하는 ‘저절로 굴러가는 바퀴’가 된다.
중국 근대 문학의 아버지로 칭송을 받는 루쉰은 말했다.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다.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길이 된다.”
미국의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눈앞에 길이 훤히 보인다면 그것은 너의 길이 아니다”라고 했다.
우리는 의무로 살아가는 낙타에서 등의 짐을 다 벗어 던지고 세상을 향해 포효하는 사자가 되어야 한다.
니체는 사자는 다시 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는 항상 ‘눈부신 현재’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아이에게는 과거와 미래가 주는 중압감이 없다. 오로지 찬란하게 빛나는 현재가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아이는 마냥 즐겁다.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 나짐 히크메트, <진정한 여행> 부분
산에서 바라보는 나무와 풀들, 작은 동물들. 다들 자신들의 길을 찾아가고 있다. 기존의 길들이 망가졌다고 당황하지 않는다.
우리도 야생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
야생의 힘은 캄캄한 우리 마음속에서 별빛처럼 빛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진정한 여행을 시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