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없는 자아는 없다

by 고석근

타자 없는 자아는 없다


타자를 소유하고 이해하고 안다면, 그는 타자가 아니다.


- 임마누엘 레비나스 Emmamuel Levinas (1906-1995, 프랑스의 철학자)



중국의 동화작가 위리가 지은 그림책 ‘네가 있어 너무 좋아’는 화가와 아기구름의 따뜻한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구름이 몰려 들더니 ‘쏴-’하고 비가 세차게 퍼붓기 시작했다. 천천히 걸어가는 수염이 덥수룩한 아저씨를 본 아기구름은 생각했다.


‘짐이 너무 무거워 빨리 걸었을 수 없나 봐. 내가 가서 도와 줘야지.’


아기구름은 사뿐히 아저씨 머리 위로 날아가 우산이 되어주었다. 갑자기 비가 내리지 않자 아저씨는 무슨 일인가하고 고개를 들어보았다.


“고맙구나! 아기구름아!”


아저씨는 아기구름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아기구름은 아저씨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방 가운데에는 커다란 이젤이 세워져 있고, 탁자와 바닥에는 여러 가지 물감들이 쌓여 있었다.


“야! 그림 그리는 아저씨네!”


이후 아저씨와 아기구름은 친구가 된다. 아기구름은 그림 속으로 들어가 구름 한 조각으로 떠 있기도 하고, 아저씨 턱에 붙어 허연 수염이 되기도 한다.


아저씨가 쉬는 시간이면 아기구름은 하얀 고양이가 되어 아저씨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아저씨가 밖에 나갈 때는 하얀 강아지가 되어 아저씨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누구나 이러한 ‘아름다운 만남’에 대한 추억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인간관계를 힘들어할까? 우리가 어른이 되어가며 우리의 의식구조가 수직적인 인간관계에 익숙해진 탓일 것이다.


그림책 속의 화가는 아이의 마음을 지니고 있어, 아기구름과도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삼라만상을 잘 살펴보면, 모두 대등한 만남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소가 산소를 대등하게 만나지 못하면, 그들은 물이 될 수 없다.


아이들이 행복한 것은, 그들은 누구와도 대등하게 만나기 때문이다. 대등하게 만나 무한한 창조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언어를 배워가며 세상을 두 개로 나눠서 보게 된다.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 큰 것과 작은 것...... .


그래서 어른들의 만남은 항상 수직적인 관계가 된다. 아무런 창조가 일어나지 않는다.


동물은 본능에 의해 살아가지만, 인간은 생각으로 살아간다. 생각이 이분법이니, 세상은 늘 두 개로 나눠진다.


누구하고도 친구가 되기 힘들다. 어른들은 하소연한다. 부부관계, 부모와 자식관계, 상사와 부하 직원과의 관계, 동료와의 관계...... 이 모든 관계들이 너무나 힘들다고.


우리는 개성이 뚜렷한 인간, 개인(個人)이 되어야 한다. 혼자 우뚝 설 수 있어야 다른 사람과도 대등하게 만날 수 있다.


홀로서기가 안 되는 사람은 남에게 의존하려 한다. 무조건 복종하거나 지배하는 게 편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타자(남)가 없다. 레비나스는 말했다. “타자를 소유하고 이해하고 안다면, 그는 타자가 아니다.”


모든 사람은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존재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신성(神性)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혀 알 수 없는 다른 사람을 만나 ‘나’가 된다. 다른 이성을 만나 부부가 되고, 자녀를 만나 부모가 된다.


나라는 존재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 계속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해야 하는 존재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 <꽃> 부분



우리는 모두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서로 이름을 불러주며 꽃으로 피어난다.


천지자연도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며 창조되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 세상의 실상을 화엄(華嚴, 꽃으로 장엄한 세상)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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