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 오듯이 잘 산 인생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1519, 이탈리아의 화가)
자로가 죽음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했다. “아직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석가의 생각과 같다. 죽음에 대해 묻는 한 제자에게 석가는 ‘전쟁터에서 독화살을 맞은 병사’를 예로 든다.
독화살을 맞아 곧 죽게 된 병사가 옆에 있는 동료 병사에게 “독화살은 누가 쏘았을까?”하고 물었다.
동료 병사가 독화살을 쏜 적의 병사가 누군지 알아보고 오자 그 병사는 이미 죽어 있었다.
석가는 그런 의문 자체가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가르친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잘 사는 게 중요하지 않느냐?’
그렇다. 죽음의 문제는 삶의 문제다. 저 들판에 피어나는 풀 한포기도 죽음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의 삶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물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뿌리를 뻗어가고, 빛을 향해 온 힘을 다해 가지를 뻗어갈 것이다.
그렇게 전 존재가 잎과 꽃으로 피어나고 열매를 맺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날 한껏 피운 자신을 툭툭 떨어뜨린다.
앙상한 마른 가지로 서 있는 가을 들풀들, 바람에 폴폴폴 흩날리고 있다. 그들은 여한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천지자연, 산천초목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생각하는 동물로 진화한 인간만이 문제다.
생각을 조금이라도 잘못하게 되면, 천지자연의 조화를 깨뜨리게 된다. 인간은 쓸데없이 자신을 과장하거나 스스로 위축되기 때문이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한다.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나서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인간에게는 근원적인 생명의 에너지가 있다. 이것을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라고 하고 니체는 ‘힘에의 의지’라고 했다.
우리는 이 힘이 향하는 곳으로 가야한다. 그런데 우리의 머릿속에 쓸데없는 지식들이 가득 차 이 힘이 향하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계속 좋아하는 것들을 해보는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좋아한다고 생각한 것들이 시들해지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살아오면서 길들여진 것들이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우리는 지치지 않는 ‘내적인 힘’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제 공부모임에서 독일에서 10여년을 살다 온 한 회원이 말했다. “독일에서는 예술가들이 우리처럼 대박을 내려고 하지 않아요. 예술과 함께 살아가요.”
예술과 함께 살아가면서 서서히 예술적인 인간이 되어 가는 삶, 얼마나 멋진가! 이렇게 자신을 한껏 꽃 피워가는 사람은 죽음도 선선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사상, 철학, 종교, 예술, 학문 등은 나와 별개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나의 삶과 함께 존재한다.
풀과 나무들이 공기를 마시고 햇빛을 쬐듯이 우리는 그런 정신적인 것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 고정희, <상한 영혼을 위하여> 부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마주치게 되는 온갖 고통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의연하게 맞서야 한다.
그러면 우리 안에서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솟아올라오게 된다. 우리는 이 힘으로 고난을 헤쳐 나갈 수 있게 된다.
전래동화에는 고난에 처한 주인공을 도와주는 동물들이 많이 나온다. 우리가 고난을 받아들이면, 천지자연의 기운이 함께한다는 상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