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자신을 알라
불후의 천재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를 보았다. 가끔 킥킥 웃으며.
불후의 화가의 일상은 어떤가? 허접하다. 우리네 장삼이사들과 다들 바 없다. 하숙집 아줌마하고 욕지거리하며 싸우고... .
아마 그가 우리 집 주위에 살았다면, 그가 불후의 화가인 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그림을 그릴 때는 달랐다. 야외에 나가 이젤을 세우고 캔버스에 물감을 칠할 때, 그의 눈빛은 형형했다.
그가 바라보는 나무뿌리는 꿈틀댔다. 나뭇잎은 춤을 추었다. 세상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세상의 파동 속으로 들어갔다. 하나의 파동이 된 그. 그의 표정은 얼마나 거룩한가!
하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그의 옆을 지나가던 유치원 교사가 “무슨 화가가 나무뿌리를 그린담?”하고 비웃을 때는 그는 다시 허접한 인간으로 돌아갔다.
마구 소리를 지르고 날뛰었다. 결국 이웃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정신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겉으로 보면, 그는 보통 사람 이하다. 그런데 우리는 칭송한다. 왜? 불후의 명작을 남겼으니까(그의 작품 안에 그의 고결한 영혼이 있으니까).
그럼 도대체 고흐는 어떤 사람인가? 인류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고흐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하면 고흐는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알아야 하는가?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하는 것은 너의 허접한 꼴을 알라는 게 아니다. ‘네 안의 로고스를 알라’는 것이다.
천지자연의 이치가 로고스다. 이 로고스를 아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다. 그 마음도 로고스다.
이 로고스를 완벽하게 아는 사람이 바로 고흐다! 온 몸으로 로고스가 된 사람이다. 이 우주의 실상은 에너지의 율동이다.
고흐는 그림을 그릴 때, 에너지의 율동이 되는 사람이다. 이게 아는 것이다. 머리를 이해하는 것은 진정으로 아는 게 아니다.
우리도 ‘고흐’가 될 때가 있다. 장엄한 풍경을 만났을 때다. 혹은 사랑을 할 때다. 고흐의 그림을 볼 때다.
이때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나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다. 허접한 나에서 ‘거룩한 나’가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것은 이 거룩한 나가 진짜 나이니, 항상 이 진짜 나를 잊지 말고 살아가라는 것이다.
이 진짜 나를 잊고 살아가게 되면, 인간은 진짜 허접하게 된다. 원시인들은 허접해진 자신들을 의례 행위를 통해 정화했다.
집단적으로 춤을 추며 허접한 자신들에서 거룩한 자신들로 변신했다. 이 세상은 다시 거룩한 태초가 되고, 그들은 다시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이제 집단적 의례는 사라졌다. 이제 각자 자신들을 정화해야 한다.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를 해야 한다.
허접해진 자신들을 자주 원래의 마음으로 되돌려야 한다. 고흐처럼 그림을 그리거나, 어떤 다른 무엇으로 자신들을 정화해야 한다.
그래서 이 시대에는 누구나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아름다움이 인류를 구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왕궁) 대신에 王宮(왕궁)의 음탕 대신에
五十(오십)원 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 김수영, <어느날 古宮(고궁)을 나오면서> 부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께서도 얼마나 허접한가!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하지만 그는 항상 잊지 않았을 것이다. 진짜 자신의 모습을. 한 시대를 품고 있는 그의 뜨거운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