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떨어지는 새똥
뒷산에 오르다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데,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내 옆의 벤치에 앉더니 전화를 한다.
까르르 까르르 웃어가며 쉼 없이 재잘댄다. ‘언제 끝나려나?’ 나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가고, ‘내가 일어설까’ 하는데, 그 여자 아이가 “악!” 비명을 지른다.
“이게 뭐야? 새똥 같은데, 노란 색이야. 새똥은 하얀 색 아냐?” 그녀는 투덜대며 일어서 갔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새똥, 피할 방법이 없다. 새는 무심코 배변을 했을 뿐인데, 당하는 자에게는 이 무슨 날벼락인가!
하지만 당하는 자도 새를 원망할 수는 없다. 다들 몇 번 투덜대다 만다. 만일 사람이 그렇게 했다면, 큰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장자가 말하는 ‘허주(虛舟)’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배로 강을 건너려는데 빈 배가 떠 내려와 자기 배와 부딪치면 비록 속 좁은 사람이라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 (...) 이와 같이 사람들이 자기를 비우고 세상을 살아간다면 그 누가 그를 해하려 하겠습니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수많은 사람들이 빈 배와 같지 않을까?
어떤 원시인들은 남에게 피해를 주었을 때 “어쩔 수 없었어요.”하고 말한단다. 그렇지 않겠는가?
남에게 피해를 주며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피해를 주게 된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지는 일이지만, 가해자의 마음이 빈 배와 같으니, 어쩌겠는가?
그래서 원시인들은 어쩔 수 없이 피해를 주었지만, 가해자는 피해자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피해자에게 보상을 한다고 한다.
몸을 다쳤다면, 몸이 나을 때까지 옆에서 돌보아 준다고 한다. 물적 피해를 주었으면, 원상 복구를 해놓는다고 한다.
그런데 현대문명인은 어떤가? 범죄를 저지르고서는 감방에서 ‘몸으로 떼우는’ 게 아닌가?
피해자의 상처 받은 마음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가끔 잔인한 사적 복수가 행해진다.
우리 사회도 원시인들처럼 서로의 마음을 보듬어주는 사회가 되면, 가해자와 피해자는 함께 어울려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래 전에 가까운 사람에게서 금전적으로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 그때 그는 말했다. “돈이 속이지 사람이 속이나?”
‘어떻게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 그때는 속에서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는데, 지금은 생각한다.
‘그도 어쩔 수 없었겠지. 어렵게 사업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겠지.’ 그의 황량한 얼굴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그는 지금 그때를 기억할까? 겉으로는 잊어버렸을지 몰라도 깊은 무의식에는 돌덩이처럼 얹혀 있을 것이다.
다들 뭔가 부족한 사람들, 함께 어울려 오순도순 살아가는 사회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물들어가는 앞산바라기 하며
마루에 앉아 있노라니
날아가던 새 한 마리
마당에 똥 싸며 지나갔다.
(...)
떠나가는 곳 미처 물을 틈도 없이
지나가는 자리마저 지워버리고 가버린 새
금 그을 줄 모르고 사는
그 새.
- 임길택, <똥 누고 가는 새> 부분
시인은 마당에 똥 싸며 날아가는 새를 보며 노래한다.
‘금 그을 줄 모르고 사는/그 새.’
그래서 새는 여전히 우리에게 ‘영원한 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