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도단(言語道斷)
한 제자에게서 문자가 왔다. ‘시(詩)가 글자로만 들어와요. 어떻게 해야 하죠?’ 나는 그녀와 문자를 주고받으며 시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공자는 일찍이 그의 아들 백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를 공부하지 않으면 마치 담장을 마주 보고 서 있는 것과 같아서 더 나아가지 못함과 같으니라.”
나는 30대 중반에 시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벽 같은 존재였다. 시인들이 감탄하는 시 앞에서 나는 무덤덤했다.
나는 노트를 가방에 넣고 도서관에서 시를 필사하기 시작했다. 시집, 문예지를 펼쳐 마음에 드는 시가 나오면 노트에 베꼈다.
노트가 20여 권이 되었다. 그 시들을 낭송하며 녹음했다. 녹음한 시들을 계속 들었다.
어느 날 귀가 열렸다. 시가 들리기 시작했다. 좋은 시를 보면 몸이 전율했다. 딱딱하게 굳은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시가 어려운 이유는 우리의 사고가 언어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언어도단, 언어가 끊어져야 한다.
사람들은 꽃을 보면 “예쁘다!”고 감탄을 한다. 꽃을 언어로 보아서 그렇다. 감탄하는 얼굴 표정을 보면 딱딱하게 굳어 있다.
우리는 “꽃이 예쁘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그래서 꽃을 보면 자동적으로 나온다. “꽃이 예쁘다”
공부 모임 시간에 ‘꽃에 대한 경험’을 얘기해 보게 했다. 한 회원이 “꽃을 보면 슬프다”고 말했다.
그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긴 전 함께 절에 가서 수국을 보았다고 했다. 그래서 수국을 볼 때마다 슬프다고 말했다.
그렇다 우리는 꽃에 대한 경험이 다 다르다. 그 경험에서 나오는 느낌, 언어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꽃을 보고 예쁘다고 하는 것은 진정한 자신의 느낌이 아니다. 이러한 상투적인 말을 계속 하게 되면, 시를 모르는 벽 같은 존재가 된다.
우리는 사물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보는 것은 사물의 언어다 사물 자체가 아니다.
언어가 끊어져야 한다. 언어가 끊어진 상태에서 드러나는 사물, 그때 나오는 언어, 그때 우리는 진정한 나가 되고 사물은 사물 자체가 된다.
그래서 공자는 “시는 사람에게 사물을 바로 보게 한다.”고 말했다. 시는 다른 사람과 세상을 온전히 만나게 한다.
시를 아는 사람은 깊은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신명이 있다. 삼라만상과 근원적으로 만나기 때문이다.
시인아,
말들을 서로 삼켜버리게 해라.
- 옥따비오 빠스, <시> 부분
말들이 서로 삼켜 버린 자리, 시가 피어난다.
시는 천지창조의 말씀,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