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모습
뒷모습은 정직하다. 눈과 입이 달려있는 얼굴처럼 표정을 억지로 만들어 보이지 않는다. 마음과 의지에 따라 꾸미거나 속이거나 감추지 않는다. 뒷모습은 나타내 보이려는 의도의 세계가 아니라 그저 그렇게 존재하는 세계다.
- 미셸 투르니에,『뒷모습』에서
오래 전의 유머 한 토막, 최불암(텔렌트)이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다가오던 한 젊은이와 눈이 마주쳤다.
젊은이가 말했다. “너 갈구냐?” 최불암이 눈을 내리 깐 채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갈구가 누구지?”
최불암은 나 같은 베이비붐 세대에게는 우상 같은 존재였다. 배경 음악과 함께 TV 화면에 등장한 수사반장, 최불암은 우리의 가슴을 뛰게 했다.
그런 그가 이제 골목길에서 마주친 젊은이의 눈빛을 피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젊은이가 최불암의 눈을 흘겨보며 “너 갈구냐?”하고 소리쳤었을 때, 최불암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처법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바보처럼 행동하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무서운 신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기성세대의 꼰대짓거리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의 대두를 그 유머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이후에도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꼰대짓을 하려는 많은 기성세대들이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이제 젊은이의 시선을 기성세대는 알아서 피하게 되었다. 시선은 인간의 동물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보는 자는 강자이고, 보여지는 자는 약자인 것이다.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에게 ‘강자인 자신’을 보여주려 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지친다. 일상의 삶이 연극이 된 세상은 얼마나 힘이 드는가!
미셸 투르니에의 ‘뒷모습’은 인간의 ‘그저 그렇게 존재하는 세계’를 보여준다. 뒷모습들이다.
인간의 뒷모습에는 억지로 만들지 않은 삶, 그대로 온전한 인간 본래의 삶이 있는 것이다.
사진과 함께 실려 있는 그의 글들은 평온하다. 그대로 존재하는 세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인상파 화가 폴 세잔의 정물화는 그대로 존재하는 사과들을 보여준다. 그는 인간의 시선이 앗아간 사과의 존재를 되찾아왔다.
우리는 언제 서로를 무심히 바라볼 수 있을까? 흘러가는 구름을 보듯, 그렇게 선한 눈빛으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나태주, <풀꽃> 부분
우리가 ‘풀꽃’을 보면, 풀꽃으로 보인다. 꽃이라고 부르기에는 많이 부족한.
하지만 우리가 자세히 보고, 오래 보게 되면, 풀꽃과 우리의 마음이 서로 교감하게 된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어떤 광휘에 휩싸이게 된다. 오묘하고 신비스러운 풀꽃이 우리 앞에 놓여 있게 된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존재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