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톱과 문학

by 고석근

고스톱과 문학


인생과 문학을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나는 통감한다. 모든 훌륭한 것들의 배후에는 개인이 서 있으며, 인간을 만드는 것은 시대가 아니고, 시대를 창조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 오스카 와일드



교사 생활 5년차가 되자 ‘베테랑 교사’가 되었다.교실에 들어가면 분필을 들고 수업 지도안을 보지도 않고칠판 왼쪽 위에서 오른 쪽 아래까지 죽 써 내려갔다. 아이들은 “와!” 했다. 놀리는 건지 감탄인지 모를 탄성이었다.

같은 내용을 몇 년 가르치다보면 다 외우게 된다. 시험 나올 건 뻔하고 교과서 외의 다른 것을 가르칠 순 없고, 배우고 가르치는 재미는 없는 나른하고 지겨운 수업 시간이 되어 버린다.


이 지겨움을 이기는 방법으로 나는 테니스를 쳤다. 오후 세시 반이면 수업이 다 끝난다. 그러면 나는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테니스 라켓을 들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몇몇 동료 교사들이 함께 나온다.


그러면 우리는 술내기 게임을 했다. 신나게 볼을 치고소리치다 보면 퇴근 시간 다섯 시가 된다. 적당히 땀을 흘린 시간이다. 교무실로 와 옷을 갈아입고 가는 곳은 학교 앞의술집이다.


분필 가루를 씻어낸다며 삼겹살을 지지직 구워 소주와 함께 들이켰다. 취흥이 도도한 분위기를 만끽하다 보면 밤은 깊어가고 우리는 그 깊은 밤을 그냥 보낼 수 없다며 학교로 다시 돌아간다.


숙직하는 동료 교사를 위문 방문한다는 명분이었다. 우리가 찾아가면 멀건이 TV만 보던 동료 교사는 반색을 한다. 숙직실 깊숙이 숨겨 놓은 동양화(화투)를 꺼낸다. 우리는 벌건 얼굴로 둘러앉아 고스톱을 치기 시작한다.


화투 한 장을 들고 몇 시인가 시계를 보면 새벽 두 시다. 탁 치고 나서 다시 시계를 보면 세 시였다. 신선놀음이었다. 세속의 시간과 별개로 가고 있었다. 우리는 세상 위를 붕붕 떠다니다 새벽 네 시쯤 되면 이제 속세로 가야지 하며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집에 가서 잠깐 눈을 붙이고 부랴부랴 학교로 다시 달려갔다. 초췌해진 얼굴로 서로 빙긋빙긋 웃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은 어제 이야기. 이야기 거리가 떨어지면 다시 우리는 추억 만들기를 했다.


교직을 그만둔 후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며 문학을 공부했다. 문학은 달디 달았다. 공개강좌를 찾아다니고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공부했다. 3년쯤 지나자 긴 터널을 빠져나온 느낌이었다. 나는 세상에 속고 살았던 것이다. 노예로 살면서도 노예인 줄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


같이 공부하던 벗들과 한강 고수부지로 가서 술 마시고 토론을 하며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다. 희끄무레한 저녁에 술을 마셨는데 역시 날이 희끄무레해 몇 시인가 봤더니 새벽 다섯 시였다.


10여 시간이 번개처럼 지나갔다. 교사 시절에 고스톱 치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고스톱은 이 세상과 동떨어진 유토피아라면 문학 공부는 이 세상 그 자체였다. 이 세상이 그렇게 감미로웠다.


사람들이 도박을 하는 이유는 이 세상이 권태롭기 때문이다. 세상의 삶이 긴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릴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이 세상의 삶이야말로 얼마나 스릴이 있는가?


문학을 공부하며 나는 내가 단지 이 세상의 한 자그마한 개체가 아니라 세상 그 자체이고 이 세상의 주인임을 알았다. 나는 이 거대한 세상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내 마음에는 이 세상이 다 있다. 나는이 세상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전체인 것이다.


이 위대한 발견이 내 삶을 완전히 바꾸었다. 나는 나를 존귀하게 보게된 것이다. 석가가 태어나자마자 외쳤다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의 뜻을 알게 되었다. 나를 존귀하게 보게 되자 세상을 더 깊이 바라볼 수 있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더 넉넉하게 대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는 나, 내 가족에 한정되어 있던 관심이 세상으로 넓혀갔다.그러니 삶이 얼마나 스릴이 있는가? 굳이 고스톱을 칠 필요가 없게 되고 항상 내 마음은 깨어 있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전보다 좀 나아졌다는 의미이지 내가 그렇게 고상하게 되었다는 건 아니다. 삶의 비의를 조금 예감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전의 삶은 청산되었다. 내 작은 이익과 그 이익에 마음이 휘둘리던 것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상담심리학에서는 자존감을 아주 중요시한다. 자존감이 높아야 자아실현으로 올라간다고 한다. ‘고상한 인간’은 자존감을 그 출발점으로 한다. 나는 문학 공부로 자존감을 되찾게 되었다. 나를 귀중하게 보며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나는 강의를 다니며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는 수강생들을 많이 본다. 문학의 힘이다. 자존감을 갖게 된 수강생들은 눈빛과 얼굴 표정이 달라진다. 당당하고 부드러워진다. 그들은 자아실현의 고지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세찬 바람은 내 책을 여닫고,

파도는 분말로 바위에서 마구 솟구치나니!

날아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숴라, 파도여! 뛰노는 물살로 부숴버려라

삼각돛들이 모이 쪼던 이 조용한 지붕을!


- 폴 발레리,《해변의 묘지》부분



나는 문학을 만난 것을 내 삶의 최대의 행운으로 여긴다. 인간은 그 자체로 고매하고 인간의 삶은 눈부시게 찬란하다는 걸 문학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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