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
악은 생각하지 않는데서 출발한다. 그것이 악의 평범성이다. 슬픈 사실은 대부분의 악행이 선과 악 중 하나를 결코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다는 것이다. 악은 무관심에서 번창하며 무관심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 한나 아렌트,『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수많은 유태인들을 학살하고서도 자신은 죄가 없다고 말하는 아이히만, 그는 자신이 충실한 공무원이었다고 주장한다.
상명하복, 공직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는 오로지 상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니까, 자신은 당연히 무죄라는 것이다.
그도 처음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원초적인 욕구가 무엇인가?
‘먹고 사는 것’이다. 상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굶어죽어! 그는 차츰 ‘악의 평범성’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인류의 스승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라!”고 말한다. 하지만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은 주인의 삶을 살지 못한다.
따라서 대다수 사람들은 ‘평범한 악인들’이다.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고상한 이유를 댄다.
핵폭탄을 발명한 사람은 뭐라고 생각할까? 그는 ‘나는 오로지 진리 탐구를 한 게 아닌가?’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럼 핵폭탄을 투하한 사람은? 그는 ‘나는 조국을 지키기 위한 신성한 목적을 위해 핵폭탄을 투하한 거야!’
많은 신도들을 살해한 사이비 교주들은 ‘나는 신의 명령에 따라 그렇게 한 거야!’하고 생각할 것이다.
악은 너무나 평범하다. 죄는 있는데 벌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주리 감독의 영화 ‘다음 소희’는 우리 사회의 악의 평범성을 보여주었다.
직업계 고등학교 졸업반인 소희는 콜센터에 현장 실습을 오게 된다. 춤을 좋아하는 씩씩한 소희.
회사는 실적을 내기 위해 계약 해지를 원하는 고객들이 해지를 할 수 없도록 만드는 업무를 지시한다.
계약을 연장하거나 상품 판매에 성공한 직원들에게는 인센티브를 준다. 무한 경쟁 속으로 들어간 직원들은 어떻게 될까?
결국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한 팀장은 자살을 한다. 소희도 차츰 ‘생(生)의 의지’를 잃어간다.
결국에는 자살에 이르게 된다. ‘소희의 죽음’을 추적하는 형사는 학교 교사와 교감, 교육청 장학사, 회사 관리자들에게 소리친다.
“막을 수 있었잖아. 근데 왜 보고만 있었냐고?” 이 형사의 눈이 우리 내면의 양심일 것이다.
악은 누구의 눈에나 훤히 보인다. 하지만 양심보다 더 절박한 게, 먹고 사는 것이다.
평범한 인간은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양심이 발동한다. 맹자는 말한다. “항산(恒産)이 항심(恒心)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자조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야!” 한나 아렌트는 ‘생각하지 않는 죄’를 얘기하지만, 그들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절대 진리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항상 그 생각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악의 평범성이 생각하지 않는 죄가 아니라, 최소한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지 않는 이 세상의 ‘악의 평범성’을 얘기해야 할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면, 먹고 사는 문제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먹을 게 세상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왜 인간만이 이렇게 먹고 사는 문제에 목을 매야 하는가? 어떤 경우에도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면, 아주 많은 악의 평범성이 사라질 것이다.
이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출퇴근을 한다. 그들에게 항상 선과 악을 생각하며 살아가라고 말해 보라!
그들은 뭐라고 말할까? 선과 악은 배가 불러야 생각할 수 있는 고차원의 사유다. 그런 높은 정신력을 일상에서 모든 사람에게 강요할 수 있는가?
한 대학생 누나
너무 배고파
메추리알 우유 김치 핫바
6,650원어치 훔쳤다고 한다
설 때도 고향집에 아무도 없는 누나
누나의 가난을
누가 훔쳐갔음 좋겠다
- 이화주, <누가 훔쳐 갔음 좋겠다> 부분
가난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 우리는 이 아이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 건, 나쁜 어른은 계속 죽고, 아이는 계속 태어나기 때문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