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永遠)은 지금이다
영원은 시간과는 상관이 없다. 시간은 우리를 영원으로부터 몰아낸다. 영원은 지금이다. 신화가 가리키는 것은 현재의 초월적 차원이다.
- 조셉 캠벨, 『블리스로 가는 길』에서
청춘 시절에 우리는 ‘영원히 사랑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랑은 바래져갔을 것이다.
사랑이 식어서일까?
하지만 우리가 ‘영원히 사랑해!’라고 할 때의 그 강렬한 느낌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우리의 가슴에 온전히 남아 있지 않았던가!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말한다. “영원은 시간과는 상관이 없다. 시간은 우리를 영원으로부터 몰아낸다.”
영원은 시간과는 상관이 없다니?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말은 분명히 맞을 것이다. 우리는 영생(永生)을 꿈꾼다.
만일 우리가 100세 인생이 아니라, 200세 1000세 인생을 살게 되면 어떨까? 더 오래 살았다는 느낌이 들까?
1만년 1억년 인생을 산다고 해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지나간 시간은 언제나 ‘찰나’라는 것을. 우리는 세월이 흘렀음을 알아차렸을 때, 화들짝 놀란다. ‘세월은 쏜살같구나!’
1000억년을 살고 나도 지난 인생을 되돌아보면 찰나일 것이다. 참으로 인생은 허무할 것이다.
조셉 캠벨은 이어서 말한다. “영원은 지금이다. 신화가 가리키는 것은 현재의 초월적 차원이다.”
우리가 ‘영원히 사랑해!’라고 했을 때의 느낌으로 되돌아 가보자! 그때 우리는 어떤 느낌이었나?
분명히 시간과는 상관이 없는, ‘영원한 사랑’을 강렬하게 느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죽어도 좋아!’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조셉 캠벨은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은 지금!’이라는 것을. 그는 신화가 가리키는 것이 ‘현재의 초월적 차원’이라고 말한다.
단군 신화에서 단군은 한 개인이면서 동시에 왕, 제사장이라는 하나의 직책이다. 그래서 단군은 죽어도 단군은 영원히 산다.
티벳의 지도자 영원한 ‘달라이 라마’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원시인들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神)의 삶을 살았다.
유한한 인간의 삶과 영원한 신의 삶을 동시에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월드컵 때 입었던 붉은 티셔츠에는, 전쟁의 신 치우천황이 있었다.
그 순간, 우리는 인간이면서 동시에 영생의 치우천황이었던 것이다. 현대문명 사회는 신화를 추방해 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을 시간 속에서 찾으려 한다. 우리는 영생불사를 꿈꾸었던 진시황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영원은 ‘현재의 초월적 차원’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살아가면서 당장에 죽어도 좋은 ‘영원한 시간’을 자주 체험해야 할 것이다.
독일의 대문호 볼프강 폰 괴테는 ‘파우스트’를 통해 ‘인간의 구원’을 보여주었다. 파우스트는 어느 순간, 외치게 된다.
“멈춰라 순간이여! 너 참 아름답구나!”
나도 오래 전에, 이런 순간을 체험한 적이 있다. 그야말로 접신(接神)의 느낌이었다.
나의 그 순간을 나의 영생으로 꽃 피우고 싶다. 나는 영생불사의 삶을 살다 가고 싶다.
어느새 나는 네 심장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죽지 않는 태풍의 눈이 되고 싶다.
- 최승자, <너에게> 부분
많은 생명체들이 사랑을 한 후, 죽는다.
사랑과 죽음과 영생은 하나일 것이다.
인간도 이렇게 영생을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영생을 찾으려 한다. 어쩌다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