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보인다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가장 훌륭하다.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하는 것은 병이다. 지부지상 부지지병 (知不知上 不知知病).
- 노자,『도덕경』에서
홍삼수 감독의 영화 ‘하하하’를 보며, 이 세상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행위예술을 보는 듯했다.
현재는 흑백으로 과거는 컬러로 나온다. 여러 사람들의 인연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얽히고설킨다.
나의 모습, 우리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비치는 거울 같다. 말간 내장들까지 다 보이는 듯하다.
문화 해설사가 말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경구’다. 그런데 이 말만큼 쉽게 소비되는 경구도 없을 것 같다.
경구는 그 상황에 딱 맞아떨어져야 경구가 된다. 적당히 좋은 말을 마구 늘어놓는 마네킹 같은 문화 해설사.
영화감독이 문화 해설사에게 말한다. “몰라야 보인다.” 문화 해설사는 무슨 뚱딴지 같은 얘기냐는 얼굴 표정으로 자리를 떠난다.
몰라야 보인다를 온 몸으로 보여준 선지자가 소크라테스다. 그는 당대의 명사들을 찾아다니며 지혜를 물어 보았다.
그들은 장광설을 펼치는데, 이야기들의 앞뒤가 맞지 않았다. 몸에 배어 나온 지식이 아니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한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허상이 쉽게 보였다. 몰라야 보이는 것이다.
자신이 모른다고 생각하는 아이는 벌거숭이 임금님을 쉽게 알아보는 것이다.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의 눈에는 입금님의 금빛 찬란한 옷이 보이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문화 해설사는 “이순신 장군이 역사적 인물이냐?”는 질문에 갑자기 광신도가 된다.
이순신 장군을 막연히 안다고 생각하던 문화 해설사는 느닷없는 질문에 멘붕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녀가 자신이 이순신 장군을 제대로 모른다고 생각했더라면, 그 질문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갑자기 위급한 상황에서 엄마를 찾는 어린 아이로 퇴행했다. “저는 믿습니다. 성웅 이순신 장군을 믿습니다.”
그는 숭엄한 얼굴이 되어 그 자리를 황급히 벗어난다. 그녀가 ‘나는 모른다’라고 생각했더라면, 쉽게 돌파구가 열렸을 텐데... .
그런데 그녀가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닌가? 하지만 우리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직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약육강식의 이 정글에서 간신히 버틸 수 있을 테니까. 우리는 진실을 알고 싶은 게 아니다.
생존이 우선이다. 아는 척해야 하고. 강한 척해야 하고, 상처 받지 않은 얼굴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상위 포식자들에게 먹잇감이 되고 만다. 우리가 “나는 이런 것 아무것도 몰라!”라고 외치게 되면, 이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을 텐데.
오늘 주인이 처음 개와 말뚝 사이를 끊어놓음.
말뚝 없는 등뼈 어쩔 줄 모름.
제자리에서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달리기도 함.
굽어진 등뼈 펴지지 않음.
개와 말뚝 사이 아무것도 없는데
등뼈, 굽어진 채 뛰고 꺾인 채 달림.
말뚝에서 제법 먼 곳까지 뛰쳐나갔으나 곧 되돌아옴.
말뚝 주위를 맴돌기만 함.
개와 말뚝 사이 여전히 팽팽함.
- 김기택, <직선과 원> 부분
이제 개와 말뚝 사이에 아무것도 없어졌는데, 개는 여전히 그 텅 빈 공간에 갇혀 있다.
개의 눈에는 여전히 그 사이에 강한 목줄이 보이는 것이다.
개는 언제 ‘아는 만큼 보이는 감옥’에서 벗어 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