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할 때가 바로 내가 쉬는 때이다
농업혁명은 안락한 새 시대를 열지 못했다. 농부들은 대체로 수렵채집인들보다 더욱 힘들고 불만스럽게 살았다.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
- 유발 하라리,『사피엔스』에서
현대 미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는 “일할 때가 바로 내가 쉬는 때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피카소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강의할 때와 글 쓸 때가 바로 쉬는 때이다.”
며칠 전 새로 만든 첫 공부 모임을 갖고 집으로 오는 길, 나는 자전거로 타고 하늘을 나는 듯 했다.
나는 좋은 강의를 하고 나면 가장 잘 쉬었다는 느낌이 든다. 글을 쓸 때도 그렇다. 글이 마음에 들면, 마지막 글자를 치고 나는 누워 깊은 휴식을 은은히 즐긴다.
인공 지능 시대가 열린다고 한다. 힘든 노동은 인공 지능이 하고, 모든 사람들의 일은 쉬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나는 ‘일’을 한다. 식사를 한 후 설거지를 해야 하고, 빨래를 해야 하고, 청소를 해야 한다.
나의 모든 일이 쉬는 시간이 될 수 있을까? 불가(佛家)에서는 깨달은 사람을 ‘일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가 하는 일은 그가 하는 게 아니라 그의 안에 있는 불성(佛性), 참나가 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말했다.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
성경 창세기에는 다음과 구절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어 놓기만 하시지 않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도록 에덴에 동산을 창설해 주셨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낳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먹이고 길러주는 것 같이 하나님께서 인생을 지으시고 양육하시기 위해 살기 좋은 에덴동산을 만들어 주신 것이다.”
아마 에덴동산은 인류의 구석기 시대일 것이다. 그때는 원시인들이 수렵, 채집 생활을 했다.
그들은 모든 사물, 인간 안에 신성(神性)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바울처럼 자신들 안의 신이 사냥을 하고 나무 열매를 딴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일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에게는 삶이 항상 아이들처럼 즐거운 놀이였을 것이다.
아이들은 자신들 안의 신명(신성)으로 행위를 한다. 모든 게 놀이가 된다. 모든 아이들은 깨달은 성자들이다.
그렇게 살아가던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거룩한 계명,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를 어겼기 때문이다.
그 후 인간은 고된 노동을 해야 했다. 선악(善惡)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삶을 선악으로 나누어 보게 되면, 힘든 것은 악이 되어버린다.
힘든 줄 모르고 하던 일이 갑자기 악이 되는 것이다. 한번 세상을 선악으로 나누어 보게 되면, 인간은 끝없이 이 세상을 선악으로 나누어 보게 된다.
죽는 줄도 모르고 살아가던 인간이 죽음을 알게 되고, 죽음은 악이 되어버린다. 악이 된 죽음은 인간을 온갖 허상 속으로 빼져들게 한다.
그래서 인간은 깨달아야 한다. 세상을 선악으로 나누어 보는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삶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알 수 있다. 선악은 뚜렷이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들도 잘 받아들이면 선이 된다는 것을.
선이라고 생각한 것들도 그 안에 무수히 많은 악을 품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인간’은 생각 하나에 의해, 낙원과 지옥을 오갈 수 있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인류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하게 한 농업혁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농업혁명은 안락한 새 시대를 열지 못했다. 농부들은 대체로 수렵채집인들보다 더욱 힘들고 불만스럽게 살았다.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
4차 혁명의 인공지능시대, 수백만 년의 인류사는 항상 도전과 응전의 역사였다. 역사는 지금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모두 일 없는 사람이 되십시오!”
노동
손, 지구를 감싸고 있는
- 뻬이따오, <태양도시의 메모> 부분
지구를 감싸고 있는 손이 어쩌다 일이 되었을까?
태양이 만물을 살리는 빛을 비추며 자신은 지금 일을 한다고 생각할까?
그 빛을 받아 잎을 틔우는 나무는 자신이 지금 일을 한다고 생각할까?
그 옆에서 민들레 씨앗을 붕붕 날리며 지나가는 바람이 자신이 지금 일을 한다고 생각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