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폭력
실재가 추동하는 네 욕망에 따라 행동하라.
-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사랑의 매’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자식을 위해서, 제자를 위해서, 후배를 위해서 사랑의 매를 들었다.
또한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이 있다. 잘 가르치기 위해, 굳이 매를 들어야 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매를 들었다. 이유는 ‘너무나 사랑해서’이다. 이때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동일시’일 것이다.
우리는 어릴 적 어머니와 하나였던 에덴동산의 시절이 있었다. 세상에 어머니와 나만 있는 지상낙원.
그때는 어머니가 바라는 것들을 자신이 바라는 것으로 생각했다. 완전한 하나, 완전한 충족.
하지만 그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조금 더 크면서 아버지가 나타났다. 아버지는 세상의 언어와 법을 가르쳐 주었다.
아버지는 절대 권력이었다. 어머니는 우리의 깊은 무의식 속으로 아스라이 사라져갔다.
우리에게는 잃어버린 어머니가 있다. 그리고 항상 자신의 머리 위에 군림하는 아버지가 있다.
임제 선사는 말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
우리는 우리 마음에 나타나는 모든 ‘허상, 권위’를 죽여야 한다. 자신이 최고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어머니를 동일시하고 아버지를 동일시할 때, 우리 안의 야수성이 튀어 나온다.
많은 남자들이 아내를 잃어버린 어머니로 착각한다. 부부폭력의 근원이다. 자식을 자신의 분신으로 생각해서 사랑의 매를 든다.
인류는 오랫동안 신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했다. 이때의 신은 아버지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 동일시가 폭력이 되는 것은 동일시가 환상을 낳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릴 적에 자신의 모습이 완전하다는 착각을 했다. 라캉이 말하는 거울 단계다.
우리 안에는 아직도 이 이상적 자아상이 있다. 이 이상적 자아상에 조금만 흠이 생기면 우리는 자기부정을 한다.
이 자기부정이 남을 향하면 가학적 폭력이 되고, 자신에게 향하면 피학적 폭력이 된다.
우리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내면의 모습이다. 그것을 남에게 전가하지 말고 그것들이 자신의 모습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라캉은 말했다. “실재가 추동하는 네 욕망에 따라 행동하라.” 실재는 우리가 자신의 이상적 자아상, 어머니, 아버지를 만나기 이전의 나다.
마음을 고요히 하면 우리는 실재를 만난다. 자신의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면 거기에 자신의 실재가 있다.
그때 솟아오르는 욕망! 그 욕망을 따라가야 한다. 우리의 생각은 온갖 환상에 젖어 있다.
생각은 세상살이에 아주 조금만 필요하다. 우리는 무심히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생각이라는 것들은 거의 다 환상이 지어낸 허상들이다.
폭력은 누군가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내것이다라고
말하는 그때에 시작된다.
- 프레드, <폭력> 부분
나는 나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다. 왜? 나는 나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혼자 고요히 머물러 보면 안다. 나는 존재 자체로 온전하다는 것을. ‘텅 빈 충만’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텅 빈 충만 속에서 하나다. 이때 우리는 서로에게 사랑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