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
취향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모든 것, 즉 인간과 사물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스스로를 구분하며, 다른 사람들에 의해 구분된다.
- 피에르 부르디외,『구별짓기』에서
나는 경북 상주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 ‘주막듬’에서 동화 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기와집 하나 없는 가난한 마을이었다.
다들 고만고만하게 살다보니 싸우더라도 금방 화해를 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았다.
마을에 잔치가 있는 날은 온 마을이 들썩였다. 흥에 겨운 부모님을 보는 건 참으로 즐거웠다.
마을 사람 모두가 하나의 가족이었다. 부모는 부모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형은 형답게, 아우는 아우답게 더불어 살았다.
그러다 읍내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는 난생 처음으로 ‘구별짓기’를 알게 되었다.
읍내 아이들은 얼굴이 희멀건 했다. 여자 아이들에게서는 향내가 났다. 우리는 책보자기를 메고 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그들은 가방을 메고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우리들의 옷소매는 콧물자국으로 반질반질했다. 나는 읍내 아이들을 피해 다녔다. 알아서 나를 그들과 구별 지었다.
그러다 6학년에 되면서 나는 그들과 어울릴 수 있게 되었다. 중학교 진학을 위해 오후에는 반 편성을 성적순으로 했다.
나는 운 좋게도 가장 우수한 아이들의 분단에 배치되었다. 희멀건 아이들과 자연스레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우리 마을 아이들이 지구 오지의 원주민 같이 보였다. 나의 마을이 싫어졌다. 그동안 즐겨 먹던 밥, 국, 반찬들이 싫어졌다.
나의 ‘취향’이 달라진 것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취향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모든 것... 모든 것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스스로를 구분하며, 다른 사람들에 의해 구분된다.”
나는 지금도 촌스러운 사람이 싫다. 그러면서도 촌스러운 사람에게 동질감이 느껴지고 그들과 얘기하면 편안해진다.
가끔 도시 변두리의 가난한 동네에 가서 순대국밥 집을 찾는다. 벽에 코를 풀지 말라는 빼뚤빼뚤 쓴 글씨를 보고는 정겨움을 느낀다.
나는 가끔 이런 말을 듣는다. “옷을 참 예쁘게 입으셔요.” 그러면 나는 쓴웃음을 짓는다.
아마 어릴 적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한 한 때문인 듯하다. 어머니는 옆 마을에 사는 고모님 댁의 사촌형의 옷을 자주 얻어 오셨다.
부모님이 내 옷을 사주셨던 기억이 한번밖에 없다. 모자 달린 옷을 그리도 입고 싶었었다.
이제 한을 풀었다. 한동안 후드티를 자주 입고 다녔다. 나의 무의식에 깊이 각인된 취향들.
나는 누가 나를 무시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객관적으로 보면 별거 아닌데도 그런 사람과 결별까지 한다.
부르디외는 취향(아비투스)을 “뇌 뿐 아니라 주름, 몸짓, 말투, 억양, 발음, 버릇 등 우리를 나타내는 모든 것에 기록된 몸의 역사”라고 했다.
아니오
사랑한 적 없어요,
세계의
지붕 혼자 바람마시며
차마, 옷 입은 도시계집 사랑했을리야
- 신동엽, <아니오> 부분
나는 도시계집을 사랑하고 결혼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시골 마을을 찾아 헤맨다. 어린 시절을 잊지 못해서다. 그때 만난 얼굴들이 너무나 그리워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