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두각시를 위하여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정말로 한 마리의 개에 불과하였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그저 나도 따라서 짖었던 것이다. 만약 남들이 나에게 왜 짖느냐고 물으면 그저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처럼 쑥스럽게 웃기나 할 따름이었다.
- 이지,『속분서(續焚書)』에서
명나라 말기의 양명학자 이지(이탁오)는 ‘나는 오십 이전에는 앞의 개가 짖으면 자신도 따라서 짖었던 한 마리 개에 불과했다’고 고백한다.
그럼 우리는 어떨까?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왔고, 크게 반성하지 않으면 계속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 자신을 뼈아프게 성찰하지 않으면 자신이 개처럼 살아가면서도 개처럼 살아가는 줄을 모를 수가 있다.
언어 때문이다. 우리는 언어를 익히며 언어에 익숙하게 된다. 자신도 모르게 언어의 명령에 따르게 된다.
‘강남’이라는 단어를 배우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강남에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게 된다.
‘루저’라는 단어를 배우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루저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경멸하게 된다.
이지가 말하는 개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언어가 우리 머릿속에서 작동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자신을 되돌아봐야 한다. 강남을 부러워하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루저를 경멸하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봐야 한다.
‘이게 진짜 내 마음이야?’ 우리 안에는 신처럼 위대한 본래의 마음, 본성(本性)이 있다.
이 본성을 이지는 ‘동심(童心)’이라고 했다. 우리가 이 ‘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깨우며 살아가면, 우리는 언어의 마법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항상 자신의 마음을 맑디맑게 하여 동심을 유지하면, 우리는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자주 명상을 하고, 혼자 조용히 있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한다. 우리 안의 영혼과 자주 만나야 한다.
좋은 예술작품을 접하고,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좋은 글을 읽으며 자신의 마음을 항상 깨어있게 해야 한다.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 자칫하면 자신이 지식인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될 수 있다.
인간이 생각하는 동물로 진화를 하며, 찬란한 문명사회를 이룩하였다. 이 찬란한 문명을 누리려면 우리는 항상 자신의 생각을 점검해야 한다.
우리가 조금만 방심하면, 언어의 노예가 될 수 있다. 언어를 넘어서 사고하지 못하면, 우리는 개가 된다.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가 시적 언어다. 시(詩)는 아이처럼 자신만의 생각이 솟아나올 때, 피어나는 언어다.
사람들과 사물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항상 마음을 무심히 하여 만날 수 있어야 한다.
무심해야 자신의 감정을 진솔하게 느낄 수 있다. 진솔한 감성 속에서 자신만의 언어가 피어난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살아가지 말아야 한다. 습관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언어의 꼭두각시로 살아가는 것이다.
매순간 깨어있기! 그래서 자신 안의 신성, 본성, 동심으로 살아가기! 우리가 치열하게 살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언어의 꼭두각시가 되고 만다.
쌀을 퍼
물에 담가 놓으면
아느작, 아느작
쌀이 물 먹는 소리
어머니는 그 소리를 쌀이 운다고 했다
- 고영민, <쌀이 울 때> 부분
나는 어릴 적 어른들의 대화에서 수많은 시어들을 들었다.
그때를 회상해본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일상적인 대화에서 시어가 사라졌다. 그만큼 세상이 살벌해졌다.
쌀이 운다고 하시는 시인의 어머니, 대모신(大母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