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분의1
인간은 그의 수단과 관련된 계산을 하는 데는 예민해졌지만 목적을 선택하는 데는 무뎌졌다.
- 막스 호르크하이머,『도구적 이성 비판』에서
고대 그리스의 철인 플라톤은 자신이 세운 ‘아카데미아’의 입구에 다음과 같은 글을 붙여놓았다고 한다.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 문을 들어서지 말라.’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들의 손에 의해 독살을 당한 후 천하를 방랑하다 수학자 피타고라스를 만나 자신이 그토록 찾던 답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수학적 이성’이었다. ‘아테네 시민들이 수학적 이성을 제대로 계발한다면 다시는 어리석은 판단을 하지 않을 거야!’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은 숫자”라고 말했다. 이 세상을 숫자로 보면, 모든 게 숫자인 듯하다.
이러한 생각이 근대의 눈부신 과학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우리는 수학적 사유에 익숙하다.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숫자로 보려한다. 공부모임시간에 한 젊은 공무원이 새로 왔다.
그녀는 요즘 고민이 있다고 했다. “데이트 할 때는 누가 밥을 사야 해요? 항상 N분의1을 해야 하나요?”
내가 젊을 때는 주로 남자가 밥을 샀다. ‘가부장 의식’이다. 그러다 여성의 지위가 올라가면서 새로운 윤리가 필요해진 것이다.
그런데 윤리도 ‘숫자’로 봐야 하는 건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은 그의 수단과 관련된 계산을 하는 데는 예민해졌지만 목적을 선택하는 데는 무뎌졌다.”
남녀의 사랑은 수단일까? 목적일까? 근대의 과학적인 사유에 젖은 우리는 남녀의 사랑을 수단으로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수학적 이성으로 보면, 사랑이 목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수단인 사랑은 당연히 숫자로 계산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남자 친구가 저보다 훨씬 많이 먹어요. 그런데도 데이트 할 때 N분의1을 하는 게 맞나요?”
인간의 최고의 행복은 ‘인간관계’에서 온다. 가장 아름다운 인간관계, 사랑마저 숫자가 되면, 인간은 어디서 행복을 찾아야 하나?
진정한 행복은 깊은 내면에서 솟아올라오는 것이다. 이러한 행복은 깊은 인간관계에서 온다.
깊은 인간관계를 잃어버리게 된 현대인은 쾌락을 찾아 나서게 된다. 커피로 하루하루를 버티게 된다.
온갖 자극적인 쾌락에 몸을 맡기게 된다. 자극적인 대중문화, 술과 마약은 현대인에게 필수적이 된다.
인간의 이성은 원래 빛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성은 도구화되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숫자로 본다.
소크라테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아테네 시민들에게는 예리하고 논리적인 수학적 이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의 모든 것을 수학적 이성으로 보려는 현대인들, 사랑까지 숫자로 파악하게 되었다.
사랑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늘 허전하다. 너무나 열심히 잘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도무지 사는 것 같지 않다.
허전하여 경망스러워진 청춘을
일회용 용기에 남은 자장면처럼
대문 바깥에 내다 놓고 돌아서니,
행복해서 눈물이 쏟아진다 행복하여
- 김소연, <행복하여> 부분
‘먹방’이 요즘 유행이다.
먹방을 생각 없이 한참 보고 있으면 행복해진다고 한다.
소소한 데서 행복을 느끼는 게 확실한 행복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