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을 넘어서
멀리 떨어진 별에서 읽는다면, 지구에서의 우리의 삶을 나타내는 머리글자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도록 이끌 것이다. 즉 지구는 분명히 금욕주의적 별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도덕의 계보』에서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다. 아직도 나의 마음에 깊이 새겨진 상처가 지워지지 않는다.
강가를 거닐고 있었다. 푸드덕 날아가는 새들의 날개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걷고 있었다.
그때 아이들의 조잘거리는 소리가 났다. 머리를 들어보니 수녀님이 아이들을 데리고 강가로 왔다.
무심히 걷고 있는데, 갑자기 수녀님과 아이들이 소리쳤다. “쓰레기 버리면 안 돼요. 쓰레기 버리면 안 돼요.”
‘헉!’ 나를 향해 손가락질까지 하며 수녀님의 선창에 따라 아이들이 합창을 하는 것이었다.
내 발 아래 쓰레기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아니? 내가 버린 것도 아닌데, 내가 이런 모욕을 당해야 하나?’
‘그렇다고 어떻게 항의해야 하나?’ 나는 나의 신분을 생각했다. 나는 그 당시 ㅊ 여자중학교 교사였다.
‘저들에게 항의하게 되면, 그 과정에서 나의 신분이 밝혀질 테고 내가 쓰레기를 버린 게 아니란 게 증명되더라도 나는 오물을 뒤집어쓰게 될 거야!’
그래서 나는 발걸음을 빨리하여 쏟아지는 언어의 폭탄 속을 벗어났다. 도망가면서도 모멸감에 얼굴이 따가웠다. ‘이게 뭐야?’
살다보면 별일 다 겪는 게 인생이다. 하지만 이런 어처구니없는 경험을 하게 되면, 사람과 세상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버리게 된다.
그 수녀님은 왜 그랬을까? 그 수녀님의 말을 따라 재창했던 아이들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나는 수녀님들에 대한 이미지가 좋다. 길을 가다 마주치게 되는 수녀님들, 얼굴이 해맑다.
몇 년 전에 천주교 재단의 중학교에 강의 간 적도 있다. 교장 선생님인 수녀님의 안내로 복도를 걸어갈 때는 나도 성스러워지는 느낌이었다.
현대 철학의 문을 연 프리드리히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멀리 떨어진 별에서 읽는다면, 지구에서의 우리의 삶을 나타내는 머리글자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도록 이끌 것이다. 즉 지구는 분명히 금욕주의적 별이다.’
금욕주의는 오랜 인류의 도덕이었다. ‘인간의 욕망은 죄의 씨앗이야! 욕망을 완전히 억압해야 해!’
하지만 욕망을 억압해서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는 욕망을 긍정하는 현대철학자들을 믿는다.
프랑스의 현대철학자 들뢰즈는 욕망을 인간의 창조적 삶의 원천으로 본다. 욕망에 의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재창조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경험적으로 들뢰즈의 사상이 맞는다는 생각을 한다. 욕망을 억제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도덕주의자가 되기 쉽다.
그들은 도덕을 위해 사는 것 같다. 도덕에 대한 강박증, 그들은 자신들도 남들도 학대하게 된다.
그 수녀님은 지구가 쓰레기로 뒤덮이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강가에서 마구 나뒹구는 쓰레기들을 보며, 아이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교육의 현장에서 희생되고 마는 ‘나’라는 한 인간에 대한 배려는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때를 회상해보면, 고결하게 사려는 한 인간의 금욕주의가 깊은 슬픔으로 밀려온다.
내 눈들은 헛된 욕망을 위해 장미로부터 색깔을
빼앗지 않는다.
- 사울 이바르고옌, <풀 한 줄기> 부분
우리는 ‘헛된 욕망’으로 세상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시인처럼 장미의 색깔을 그대로 볼 수 있어야 우리는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늘 금욕과 방탕의 두 길 앞에서 서성인다. 두 길을 다 벗어날 수 있어야 우리는 시인 같은 맑디맑은 눈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