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인을 위하여
저는 이곳에서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을 다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심부의 시각으로 변방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변방에서 우리 사회 중심부를 바라보고 고민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지요.
- 신영복,『변방을 찾아서』에서
나는 고향 상주에서 간신히 중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에 있는 ㅊ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ㅊ 고등학교는 등록금이 없고 교복과 교과서를 무료로 주고 졸업 후에는 철도공무원으로 취직까지 시켜주는 국립고둥학교였다.
전국에서 가난한 시골 아이들이 몰려 들었다. 나는 ‘가난’이라는 열등감을 가득 안고 입학식에 참가했다.
그런데 학교 분위기는 열등감이 아니었다. 선생님들과 선배들이 우리들에게 우월감을 심어 주었다.
“너희들 입학 성적이 서울에서 10위권 안이야! IQ는 ㄱ 고등학교 아이들에게도 뒤지지 않아!”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면 서울에서 양복점을 하는 사촌형님에게 갈 예정이었다.
어머니께서는 자주 말씀하셨다. “양복점에서 일하면, 명절에 고향에 올 때 양복을 입고 오지 않겠느냐?”
나는 군말 없이 어머니 말씀을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우연히 알게 되었다. 서울에 공짜로 다니고 취직도 되는 고등학교가 있다는 것을.
서울에 있는 이모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기로 했다. 그 때는 가까운 친척들끼리는 가족처럼 지낼 때였다.
나의 몸에 배인 아비투스(삶의 태도)는 ‘주변인’이다. 어린 시절 주막듬이라는 시골 마을에서 거대한 성(城), 읍내를 보며 자랐다.
다행히 시험 성적이 좋게 나와 읍내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었지만, 나는 그들 곁을 원주민처럼 맴돌았다.
고등학교는 소위 명문고라고 불리지만, 대학을 가지 못하는 가난한 아이들이 모인 실업계고.
그 뒤 어렵게 대학에 갔지만, 역시 등록금이 적은 국립사대. 나는 가끔 스스로를 ‘조선 시대의 서자(庶子)’ 라는 생각을 했다.
몸에 배인 서자 의식은 조금이라도 잘난 사람을 만나거나 화려한 공간에 가면 쭈뼛거리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나는 들어갈 수 없는 중앙. 내게 중앙은 언제나 신기루 같은 곳이었다. 안에 들어간 것 같은데 연기처럼 사라지는 곳.
나의 의식은 깊은 열등감과 강한 우월감으로 분열되어 있다. 간신히 두 의식을 통합하고 살아가는 건, ‘나의 길’을 가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길, 글쓰기와 인문학 강의. 나를 꽃 피우는 길이다. 그 길을 가며 자연스레, 열등감과 우월감이 하나로 녹아난다.
글쓰기에 출신, 재력, 학력이 무슨 상관인가! 인문학 강의는 오히려 주변인이기에 가능하다.
나는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고 삶 속에서 공부를 했다. 살아 있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나는 주변인으로 살아왔기에, 나보다 훨씬 부유하게 자라고 학력, 학벌이 좋은 분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내게는 ‘중심부의 시각으로 변방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변방에서 우리 사회 중심부를 바라보는 눈’이 있다.
물론 그 눈이 맑디맑지는 않다. 하지만 항상 눈치를 보며 살아 온 사람의 눈치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한 획을 그은 사람들은 비천한 출신의 무식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영혼은 헛것으로 가려져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20여 년을 강의하며, ‘인간의 길’을 찾아가는 공부가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소위 가방끈이 긴 사람은 가방의 긴 끈에 묶여 자유롭지 못하고, 가방끈이 짧은 사람은 가방끈이 짧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 ‘무학의 통찰’을 보여주는 짧은 가방끈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들은 일취월장한다.
가방 끈이 아주 긴 사람들이 그들과 벗하고 싶어 한다. 그들의 아우라를 알아보는 가방 끈이 아주 긴 사람들도 비범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저께 뒤풀이에서 공부모임의 한 회원이 내게 말했다. “선생님은 사람을 사랑하세요.” 내 안에서 뜨거운 기운이 울컥 올라 왔다. ‘아,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다... .’
사랑으로 나는 나이며 너이며 그들이다. 사랑으로 나는 중심이며 주변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의 상처의 노예이며 주인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의 상처를 세계의 상처 위에 겸손하게 포개 놓는다.
- 김정란, <사랑으로 나는> 부분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든다.
사랑이 부족하면, 남들과 비교하게 된다.
삼라만상이 나눠진다. ‘나와 너, 중심과 주변, 노예와 주인’ 서로 앙상하게 말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