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 위의 인문학

by 고석근

손바닥 위의 인문학


이해하기 쉬운 설명은 단순히 자세하고 세밀한 설명이 아니다. 짧은 시간에 상대가 이해했다고 여기도록 설명하는 것이 이해를 낳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상대가 이해했다고 여길까? 그 상황을 상대방이 완전히 내려다보았다는 감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 결국 상황 전체의 전망을 잘 보여주는 설명 방법이 필요하다. 그러면 상대는 그 상황을 스스로 파악했다는 감각을 가질 수 있다. 완전하지 않아도 그것이 이해의 첫걸음이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비트겐슈타인의 말』에서



대학 2학년 때, 철학자가 되어 ‘이상 사회’라는 불멸의 책을 쓰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었다.


철학 공부모임을 만들어 ㅅ 철학 교수님을 지도 교수님으로 모시고 일주일 한 번씩 모여 철학을 공부했다.

너무나 어려웠다. 교수님의 말씀이 하나도 와 닿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개념들이 안개처럼 떠다녔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아무런 답도 구할 수 없었다. 그 뒤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고 공개강좌를 찾아다녔다.


10여년이 지난 후, 차츰 깨닫게 되었다. ‘아, 철학 공부는 개념 공부만으로는 부족하구나! 개념이 체험 속에서 녹아나야 하는구나!’


그 후 나는 인문학을 강의할 때는 수강생들에게 항상 자신들의 체험을 말하게 한다.


그들의 체험이 철학의 개념들로 새롭게 해석되면, 수강생들은 어려운 철학 이론을 금방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언어로 본다. 따라서 인문학을 공부하려면, 언어에 대한 명징한 이해를 해야 한다.


20세기 최고의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해하기 쉬운 설명은 단순히 자세하고 세밀한 설명이 아니다... 어떻게 해야 상대가 이해했다고 여길까? 그 상황을 상대방이 완전히 내려다보았다는 감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는 개념을 개념으로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말한다. “그러면 상대는 그 상황을 스스로 파악했다는 감각을 가질 수 있다. 완전하지 않아도 그것이 이해의 첫걸음이다.”


나는 최근에 새로 개설한 인문학 강좌들을 하며 몇몇 분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


“선생님 강의는 귀에 쏙 쏙 들어와요. 제 인생이 바뀌었어요.” 그 분들은 새로운 삶을 꿈꾸게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대학원에서 깊이 있는 인문학을 공부하지 않았기에 인문학에 대한 지식이 얕다.


하지만 그 얕은 지식들을 수강생들이 자신들의 체험 속에서 그 지식들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듯이 명징하게 이해하게 할 수 있다.


그러면 그들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듯이 ‘스스로 파악했다는 감각을 갖게 되고 완전하지 않아도 그것이 이해의 첫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요즘 책을 낼 때마다 제목에 ‘시시詩視한’을 붙인다. 시로 보는 인문학이다. 시는 개념을 섬광처럼 보여준다.


그래서 ‘시는 보고 그림을 읽는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인문학 공부가 개념의 설명이 되어버리면, 인문학이 관념적이 되어 삶과 유리되어버린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인문 에세이들이 ‘삶을 위한 인문학’이 되게 하고 싶다. 읽는 분들이 인문학의 개념들을 손바닥에 놓은 사물들처럼 내려다보게 하고 싶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생생한 사물들처럼, 인문학이 손에 물컹물컹 잡히는 살아 있는 물질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 마음의

양심의 소리를

구두는 내게

들려준다.

우리가 해야 할

착한 일만

구두소리는

일러준다.


- 에리쟈베스 노벨, <내 구두> 부분



이 세상 전체가 책이고, 삶 자체가 공부 자료다.


책은 아주 작은 참고용일 뿐이다.


시인은 구두가 들려주는 찌익 찍 소리를 들으며 아주 잘 살아간다.


이 구두의 소리들을 언어로 표현하면, 그 언어의 의미를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하기 시작하면, 얼마나 많은 언어가 필요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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