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이 진리는 너무나 확고하고 너무나 확실해서, 회의주의자들의 가장 과도한 모든 억측들도 흔들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면서, 나는 그것을 주저 없이 내가 찾고 있던 철학의 제일원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 르네 데카르트,『방법서설』에서
우리는 학교에서 여러 학문을 배웠다.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물리학, 생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생물학, 마음의 이치를 탐구하는 심리학... .
우리가 배운 학문은 다 객관적인 이치를 탐구한다. 우리는 당연히 받아들인다. ‘여기에 있는 내가 밖에 있는 객관적인 이치를 탐구한다.’
동양의 유학에서도 이러한 공부법을 제안했다. 유학의 ‘대학(大學)’에서는 주요 공부법으로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제시한다.
격물(格物)이란 사물을 깊이 연구하는 것이며, 치지(致知)란 지식을 넓히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생각에 반기를 든 사람이 양명학의 창시자 왕양명(王陽明)이다. 그는 ‘만물의 온갖 이치가 마음에 다 갖추어져 있다는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한다.
그는 어린 시절에 격물을 해보겠다고, 친구와 함께 대나무를 온 종일 바라보며 진리를 탐구했으나 친구는 3일, 자신은 7일 만에 앓아 눕고 말았다고 한다.
학창 시절에 ‘객관적인 이치를 탐구하는 학문’을 배운 우리는 왕양명의 대나무 탐구가 우습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대나무의 이치를 탐구하는 게 뭐가 어려워?’ ‘잘 살펴보면 되잖아. 색깔은 푸른색이고, 잘 휘고... .’
푸른색, 잘 휘는 성질은 대나무의 객관적인 이치일까? 밤에 보아도 대나무는 푸른색일까? 대나무가 갈대보다도 더 잘 휠까?
우리가 객관적이라고 생각한 것들도 사실은 나의 주관과 관계없이 존재하는 게 아닌 것이다.
왕양명은 어렸지만, 어렴풋이 순수한 객관적인 이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가 당연시하는 ‘객관적인 이치’는 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로부터 시작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이 진리는 너무나 확고하고 너무나 확실해서... 그것을 주저 없이 내가 찾고 있던 철학의 제일원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후 근대는 ‘생각하는 나, 고로 존재하는 나’를 제일원리로 받아들이며, 눈부신 물질문명의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떤가? 세상이 살만해졌는가? 우리는 기후 위기 등 인류 종말의 위기에 처하게 되지 않았는가?
우리는 이제 ‘확고한 나와 객관적인 이치’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확고한 나는 없다.
나는 나도 알 수 없는 무의식에 의해 좌우되는 존재다. 우리 눈에 객관적으로 보이는 것들도 다 우리의 마음과 관계가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와 양자물리학의 등장으로 ‘확고한 나와 객관적인 이치’는 이제 하나의 낡은 생각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아직도 이 낡은 생각이 우리의 머릿속에 강고하게 자리를 잡아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신경증 나아가 정신질환에 걸리게 된다. 인간은 삼라만상과 하나로 연결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인간은 수시로 변하는 알 수 없는 존재다. 이 알 수 없는 존재가 자신의 불변하는 정체성을 믿으려니 정신이 온전할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인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의 법, 문화는 ‘확고한 나와 객관적인 이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근대산업사회의 원리가 인공지능시대, 탈근대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법, 문화 등 모든 정신적인 가치와 제도들을 현대에 맞게 재정립해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파란 산불이 났다 사람들이 산 아래 모여들어 불을 구경했다 오래 된 나무들이 탁탁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보랏빛 연기가 길게 저 너머 도시로 옮겨가고 있었다 길게 꼬리를 늘어뜨린 연기는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모두가 바라보기만 했다
- 강성은, <아름다운 불> 부분
산불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들, 그들은 지금 인도 시바신(神)의 출현을 보고 있을 것이다.
파괴가 창조야! 죽어야 사는 거야!
지금 이 세상에는 사디즘(가학증)과 마조히즘(피학증)이 만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