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에 대한 사랑

by 고석근

한 사람에 대한 사랑


그의 반쯤 벌린 입술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미소를 보고 나는 또 생각했다. ‘잠든 어린 왕자가 나를 이렇듯 감동하게 만드는 것은, 한 송이 꽃에 바치는 그의 성실한 마음 때문이다. 비록 잠이 들어도 그의 가슴속에서 등불처럼 밝게 타오르는 한 송이 장미꽃의 영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더욱더 부서지기 쉽다는 걸 알아차렸다. 등불들을 잘 지켜야 한다. 한 줄기 바람에도 꺼질지 모르는.....


- 앙투안 드 생택쥐페리,『어린왕자』에서



어제 오늘, ‘고속버스 민폐녀’라는 인터넷 기사를 보았다.


앞자리에 앉은 젊은 여성이 의자를 과도하게 뒤로 젖혀 앉는 바람에 불편함을 느낀 뒤에 앉은 노인이 항의하게 되었다고 한다.


끝내 그 여성은 의자를 앞으로 당기지 않았다고 한다. 노인은 할 수 없이 다른 의자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한 승객이 제보했단다. “뒤에 앉은 노인이 먼저 발로 의자를 툭툭 차며 반말을 했다.”


그래도 그녀를 향한 싸늘한 여론은 식지 않았다고 한다. 기자는 그녀의 주장, ‘의자를 뒤로 젖히는 건 나의 권리가 아니야?’가 공분을 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우리는 이런 사건 앞에서 망연자실하게 된다. 사실 해결이 너무나 쉬운 갈등이 아니었던가?


여성은 무심코 의자를 뒤로 젖힐 수 있다. 우리는 그동안 일상에서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뒤에 앉은 노인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그러면, 정중하게 그 여성에게 의자를 앞으로 당겨 달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네티즌들은 설령 그 노인이 정중하게 말했더라도 그 여성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라고 항변했다.

아마 그 여성의 태도와 말투에서 그런 걸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가 그렇더라도 그 노인은 정중하게 얘기를 했어야 했다.


노인이 그렇게 했는데도 그 여성이 그렇게 예의 없게 나왔다면, 우리의 공분은 정당할 것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험을 했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예와 도덕’이 사라졌다.


노르웨이의 작가 H.입센은 말했다. “한 사람도 사랑해 보지 않았던 사람은 인류를 사랑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 한 사람은 인류의 대표다. 장미 한 송이를 사랑하는 것, 그 장미는 삼라만상의 대표다.


‘어린왕자’의 주인공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잠든 어린 왕자가 나를 이렇듯 감동하게 만드는 것은, 한 송이 꽃에 바치는 그의 성실한 마음 때문이다.’


장미 한 송이 대한 사랑을 배운 어린왕자는 이제 성숙한 인간이 되었다. 주인공 ‘나’는 생각한다.


‘그가 더욱더 부서지기 쉽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의 가슴 속의 등불들을 잘 지켜야 한다. 한 줄기 바람에도 꺼질지 모르는.....’


어린왕자의 가슴에 피어난 장미 한 송이, 사랑의 등불. 우리는 이 등불을 한평생 간직하고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가슴에 이 등불이 있을까? 언제 우리가 단 한 사람을 뜨겁게 사랑한 적 있을까?


나는 젊은 시절 연애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우리의 삶은 피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의자 하나 갖고 싸우는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황폐화되어 있는가? 노인과 여성은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 밤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 문병란, <호수> 부분



우리의 가슴에는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꼭 만났어야 하는 사람인데. 그러다 세월이 흐르고 ‘꼭 만나고 싶은 사람’ 마저 잊어버렸다.


우리의 가슴은 텅 비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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