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관계 속의 존재다
어린 왕자가 말했다. “도대체 길들인다는 게 무슨 말이야?”
여우가 대답했다. “모두들 잊고 있는 건데,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 앙투안 드 생택쥐페리,『어린 왕자』에서
언어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일찍이 ‘논리 철학 논고’를 쓴 후 철학계를 떠났다.
그는 철학을 완성했다고 생각했다. 그의 언어철학은 ‘그림 이론’이었다. 산이라는 언어에는 그에 대응하는 산
이라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이런 언어는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신(神), 사랑이라는 언어에는 신, 사랑에 대응하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
이런 언어는 말하지 말아야 한다. 말하게 되면, 신, 사랑은 자신이 마음속에 그린 허상에 빠져들게 된다.
한번 허상에 빠져들게 되면, 신의 나라, 사랑의 이름으로... 허상의 세계는 점점 깊고 넓어진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언어들은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신을 믿는 사람이 보통 사람 이상의 위대한 행동을 할 때, 그는 신을 믿는 사람다울 것이다.
어떤 사람이 사랑을 말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줄 때, 사람들은 ‘사랑’의 위대함을 온몸으로 느낄 것이다.
그의 철학은 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라!”였다. 이렇게 살아가면 정말 좋은 삶이 되지 않겠는가?
살아있음 그 자체인 삶, 그야말로 어떤 망상에도 빠져들지 않는 삶. 항상 아이처럼 신나는 삶일 것이다.
이 경지는 올라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인류 역사상 이런 경지에 오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초등학교 교사, 정원사 등의 일을 하며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인도에서는 오랫동안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은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들은 고독 속에서 삶의 절정을 맛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이 편안했을까? 세상에서는 중생들이 삶의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데.
비트겐슈타인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고대 그리스의 철인 아리스토텔레스는 “혼자 사는 사람은 신이거나 야수”라고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도 관계 속에서 의미가 생겨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무라는 단어도 사람과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의미가 생겨난다.
나무라는 단어를 책상을 만드는 공장에서는 책상의 재료라는 의미로 쓸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위대한 사람을 ‘거목(巨木), 큰 나무’라고 일컫기도 한다.
그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와 이러한 언어철학을 주제로 ‘철학적 탐구’를 쓰게 된다. 그는 언어에서 관계를 발견하고서 온전한 인간이 되었다.
그는 죽음이 임박했을 때, 최후까지 자신을 돌봐 주던 주치의 베반 박사에게 “멋진 삶을 살았다고 그들에게 전해주시오”라고 말했다.
어린 왕자는 여우에게서 ‘길들임’에 대해 배운다. “도대체 길들인다는 게 무슨 말이야?”
여우가 대답했다. “모두들 잊고 있는 건데,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우리 모두가 잊고 있는 것, 길들임.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문명인들은 착각하고 있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있다!’
우리는 신이 되어 정신 병원에 갇히거나 야수가 되어 묻지마 범행을 저지르게 되었다.
꽃이 피어 있다.
바로 가까이까지
곤충의 모습을 한 다른 존재가
빛을 두르고 날아와 있다.
나도 어느 때
누군가를 위한 곤충이었겠지.
당신도 어느 때
나를 위한 바람이었겠지.
- 요시노 히로시, <생명은> 부분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 어떤 존재가 된다. 하지만 우리는 잊고 산다. 혼자서 무엇이 되었다고 착각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도 모두 내 것은 없다. 몸은 한때 누군가의 몸이었고, 마음도 한때 누군가의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