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by 고석근

삶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그의 발목께서 노란빛이 반짝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한순간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는 나무가 넘어지듯 천천히 넘어졌다. 모래밭이라 소리조차 없었다.


- 앙투안 드 생택쥐페리,『어린 왕자』에서



자로가 공자에게 질문을 했다. “감히 죽음을 묻습니다.” 그러자 공자가 대답했다. ”삶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그의 가르침의 핵심은 충(忠)과 서(恕)였다. 충은 ‘마음(心)의 중심(中)’이다. 우리가 마음을 고요히 하면 마음이 중심을 잡는다.


중심을 잡은 마음은 천지자연과 하나다. 이 마음으로 살아가면, 천지자연의 이치와 하나가 된다.


따라서 남의 마음(心)과도 같게(如) 된다. 용서(容恕)는 남의 마음과 하나가 될 때 가능하다.


충과 서의 삶이야말로 최고의 삶이 아닌가? 올바른 삶이니까 당연히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신이니 사후 세계니 알려고 하지 않아도, 신의 뜻에 맞는 삶이 되고 사후 세계가 있다면 좋은 사후 세계에 갈 수 있을 것이다.


공자가 죽은 후 1500여 년이 흐른 후, 송의 주자가 등장해 공자의 가르침, 유학은 성리학(性理學)으로 변모하였다.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性)에 천지자연의 이치(理)가 있다는 철학 이론이었다. 성리학은 이 본성과 리에 대한 깊은 탐구로 이어졌다.


본성과 감정(情), 리와 기(氣)... 처음에는 성리학이 삶을 위한 철학이었지만 차츰 관념화되어 갔다.


이 성리학이 조선 시대에 들어와 일본의 침략(임진왜란)이 임박했음에도, 많은 선비들은 이기론(理氣論)의 논쟁에 몰두했다.


공리공담(空理空談), 실제로 아무 소용이 없는 헛된 말들, 공자가 금지했던 말들이 난무했다.


20세기 최고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오랫동안 인류는 이런 헛소리들이 철학의 이름으로 행해져 왔다고 말했다.


위대한 철학자 칸트는 우주가 끝이 있느냐 없느냐와 같은 관념적인 것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관념에 빠지지 않았던 칸트는 죽을 때, 포도주 한 잔 마시고는 “좋다!”고 말했다.


이런 헛소리들을 하지 않고 살았던 비트겐슈타인도 죽을 때, ”멋진 삶을 살았다“고 말했다.


공자는 죽을 때, 침묵을 지켰다고 한다. 그는 자연스레 천지자연의 운행에 몸을 맡겼을 것이다.


어린 왕자는 깔끔하게 죽는다.


‘그의 발목께서 노란빛이 반짝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한순간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는 나무가 넘어지듯 천천히 넘어졌다. 모래밭이라 소리조차 없었다.’


어린 왕자가 치열하게 좋은 삶을 추구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삶의 절정에서 노란빛이 반짝였다.


노란 뱀은 땅속의 비밀, 인간의 깊은 무의식의 비밀을 다 알고 있는 위대한 현자다. 어린 왕자는 현자의 지혜를 몸으로 깨치고 죽었다.


어린 왕자가 사막의 여우에게 배운 지혜가 바로 공자의 ‘충과 서’다. 충과 서의 정신은 노란빛으로 나타날 것이다.



둥그렇고 싯누런

완벽한 죽음의 얼굴이

동산 위에 떠올라

잠든 세상의 꿈을

마구 뒤섞어 달빛으로 절여 먹는다


- 김혜순, <달> 부분



낮에 온 세상에 쨍쨍하게 내리비치던 태양이 지고 나면, 달이 떠오른다.


달은 죽음의 신이다. ‘잠든 세상의 꿈을/ 마구 뒤섞어 달빛으로 절여 먹는다’ 우리는 속수무책 그의 뜻에 따라야 한다.


인간은 왜 달을 죽음의 신으로 숭배하게 되었을까? 죽음이라는 말을 모르는 아이들은 달을 하늘 높이 떠 있는 노란 풍선으로 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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