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지용(無用之用)
“사람들은 부랴부랴 급행열차에 뛰어들지만 자기들이 찾는 게 무언지도 이제는 모르고 있어. 그래서 안절부절못하고 뱅뱅 도는 거야...... .” 어린 왕자는 말했다.
- 앙투안 드 생택쥐페리,『어린 왕자』에서
오래전에 술집에서 인문학 공부를 했었다. 그때 옆 방에서 한 회원의 남편이 무슨 공부를 하나 궁금해 귀를 기울이고 듣고 있었다고 한다.
그 회원이 다음 모임에 나와 말했다. 자기 남편이 이렇게 말하더란다. “야, 다 쓸데없는 말만 하더라.”
우리는 그 말을 들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 후 내가 하는 인문학 강의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식당을 운영하는 그녀의 남편이 보기에는 우리의 열띤 토론들이 다 쓸데없는 것으로 보이는구나!
그 모임의 회원들이 거의 다 독서, 글쓰기 강사들이라 다양한 인문학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에게 독서, 글쓰기를 가르치는 분들 입장에서는 우리가 공부하는 내용들이 절실한 것들이다.
그럼 누구의 입장에서 인문학을 봐야 할까? 독서, 글쓰기를 배우는 아이들 중에서도 많은 아이들이 나중에 식당을 운영하게 될 텐데.
어른이 되어 식당 경영자가 된 그 아이들은 학창 시절을 이렇게 회상할까? ‘다 쓸데없는 것을 배웠구나!’
한때 ‘글쓰기’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글짓기에 대항해 나온 ‘삶을 위한 글쓰기’였다. 나는 그 당시 글쓰기 운동을 제창하신 이오덕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다.
글짓기는 글을 짓게 한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글을 쓰지 않고, 예쁜 글을 짓게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런 글들이 많다. 그렇게 글을 배운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글을 예쁘게만 지으려 한다.
백일장이나 소소한 문학상 심사를 할 때마다 글재주가 있어 보이는 분들의 장식적인 글을 만나게 된다.
그때마다 깊은 자괴감을 느낀다. 글을 쓰는 것은 마음의 힘을 키우는 것인데, 이렇게 글을 쓰게 되면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게 된다.
그렇게 부풀어진 마음은 언제 펑 터질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작은 고난에도 쉽게 무너진다.
나는 이오덕 선생님의 글쓰기 철학에 입각해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고, 어른들에게는 글쓰기 지도법 강의를 했다.
그때 인문학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인문학의 지식들이 교양을 위한, 장식적인 지식들이었다.
‘삶을 위한 인문학’이 아니었다. 대학생들, 청년들에게 강의를 해보면, 그들은 잡다한 인문학 지식들만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을 위한 인문학이 아니면 도대체 인문학을 왜 배워야 하는가? 지금도 나는 인문학을 강의하며 인문학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현대인들을 항상 바쁘다. 계속 앞으로 질주한다. 자본주의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다.
자본주의는 계속 새로운 상품을 생산해 낸다. 신상을 쫓아가야 한다. 어린 왕자는 말했다.
“급행열차에 뛰어들지만 자기들이 찾는 게 무언지도 이제는 모르고 있어. 그래서 안절부절못하고 뱅뱅 도는 거야...... .”
인문학은 바쁘게 사는 사람들에게 느리게 사는 법, 고요히 한 곳에 머무는 법을 가르쳐 줘야 한다.
하지만 잡다한 지식들이 머릿속에서 와글거리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문학을 가르쳐야 할까?
가방끈이 짧은 분들은 인문학 강의가 쉽다. 그들은 오랫동안 경험으로 살아왔기에, 경험을 바탕으로 인문학 강의를 하면, 그들은 쉽게 삶을 위한 지혜를 배운다.
문제는 가방끈이 긴 분들이다. 명문대를 나오고 전문직에 있는 분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지식들을 바탕으로 강의를 해야 한다.
쓸데없는 지식들을 쓸 데 있게 해야 한다. 장자의 ‘무용지용’이다. 죽어 있는 지식들을 살아있는 지식으로 변환하는 연금술의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
그 조그만 것들 모두 어디로 갔나
쓸데도 없이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웠느니라
- 심호택, <아무것도 모를 때> 부분
어릴 적에는 너무나 작은 것들과 함께 놀았다. 돌멩이 하나, 나뭇잎 하나에 온 우주가 다 있었다.
우리는 항상 신비감에 휩싸였다. 삶은 언제나 통통 튀는 신명이었다. ‘아무것도 모를 때’였다.
나무나 많은 것을 배운 지금은 그 조그만 것들은 아예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눈은 언제나 저 먼 곳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