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은 하나다
“내가 아파하는 것처럼 보일 거야 어쩌면 죽는 것처럼 보일 거야....... . 그런 거야. 그걸 보러 오지 마. 그럴 필요가 없어...... .”
- 앙투안 드 생택쥐페리,『어린 왕자』에서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할아버지 댁에 자주 갔다. 아마 추석 다음 날이었을 것이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아버지가 어떤 아저씨와 싸우셨다. 아버지는 크게 소리치셨다.
“나를 무시하지마! 나 이 다음에 올 때는 택시 타고 올 거야!” 나는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때의 광경은 지금도 흑백사진처럼 내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다. ‘나를 무시하지마!’ 아버지의 목소리는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그 후 그 말은 나의 화두가 되었다. 나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이 마음이 쌓이고 쌓여 불안장애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렇게 강고해진 나, 나는 ‘자의식 과잉’이다. 나는 인문학을 공부하며 이 비대해진 나를 성찰하기 시작했다.
제2의 석가모니로 칭송받는 나가르주나(용수보살)는 말했다. “가는 자는 가지 않는다. 가는 자가 아닌 것도 가지 않는다.”
‘가는 자는 가지 않는다.’ 나는 처음에는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는 자, 내가 지금 간다고 생각해 보자.
당연히 가는 내가 가지 않는가? 그러다 불교의 ‘공(空) 사상’을 공부하며, 그 말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공 사상은 삼라만상을 공, 텅 빈 것으로 본다. 나(我)도 없고(空), 세상(法)도 없다(空)는 사상이다.
‘나’라는 존재는 분명히 있지만, 나라는 ‘실체’는 없다. 내 육체는 내가 먹은 음식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음식들도 계속 바뀐다. 10년 전의 나의 육체는 지금의 나의 육체와 완전히 다르다.
마음도 그렇다. 계속 바뀐다. 나라는 존재가 있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은 나의 기억일 뿐이다.
따라서 ‘가는 자’인 나는 어떤 고정불변한 나, 자기 동일성이 없다. 계속 바뀌는 나, 생성 변화하는 나가 있을 뿐이다.
이 생성 변화하는 나, ‘가는 자’는 가고 있는 자다. 이 가는 자는 이미 가고 있는데, 어찌 또 간다는 말인가!
그래서 ‘가는 자는 가지 않는다.’ 그 반대 역시 성립할 수 있다. ‘가는 자가 아닌 것도 가지 않는다.’
가는 자, 가는 자가 아닌 것, 이런 생각들은 우리가 평소에 쓰고 있는 명사 때문이다.
‘명사적 사유’에 젖어 버린 우리는 가는 자를 동사적 사유로 생각하지 않고 명사적 사유로 생각하게 된다.
명사적 사유로 세상을 보게 되면, 이 세상은 고정불변한 것들이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
‘눈이 온다’는 말을 쓰게 되면서, 눈이 있다는 망상에 빠지게 된다. 눈은 하늘에서 땅으로 오고 있는 동사다.
눈이라는 명사는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꽃이 핀다’는 말도 그렇다. 꽃은 피어나고 있는 동사다.
동사인 꽃이 어찌 또 동사(핀다)가 될 수 있는가? 명사는 의사소통을 위해 생겨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명사들을 자꾸 쓰다 보면, 우리는 이 명사들이 실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언어가 사고이기 때문이다. 나가르주나는 단지 이름일 뿐인 것을 실체로 생각하는 망상을 깨기 위해 ‘중론(中論)’을 썼다.
‘중(中)’은 서로 반대인 것을 하나로 보는 ‘인간의 원초적 사유’다. 언어 이전의 사유다.
나라는 존재의 실체는 없다. 하지만 분명히 나는 지금 여기에 있지 않는가? 이 생각이 중이다.
나는 없으면서도 있는 것이다. 실체는 없지만 지금 여기에 ‘생성 변화하는 존재’로 있는 것이다.
삼라만상이 다 그렇다. 이러한 이치를 불교에서는 ‘연기(緣起)’라고 한다. 연기는 ‘모든 존재는 조건에 의해 생겨난다’는 사상이다.
나도 눈도 꽃도 다 조건에 의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실체는 없이 삼라만상이 존재하는 이치다.
이러한 연기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되어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나처럼 자의식이 강한 사람은 강고한 자아로 인해, 이 세상을 흑백논리로 보게 된다.
‘너와 나, 선과 악, 삶과 죽음’이 선명해 사는 게 고달파진다. 실체로 존재하지도 않는 ‘너, 악, 죽음’과 한평생 싸우게 된다.
‘나를 무시하지마!’ 나라는 존재는 없다. 당연히 선과 악도 삶과 죽음도 없다. 명사적 사유에서 동사적 사유로 전환하는 것, 이것이 깨달음이다.
우리 안에는 명사적 사유에 길들여지지 않은 어린 왕자가 있다. 우리의 깊은 내면에서 잠자고 있는 이런 왕자를 깨워야 우리는 진정한 나가 된다.
그때 서야 우리는 신나게 살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 때, 어린 왕자처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아파하는 것처럼 보일 거야 어쩌면 죽는 것처럼 보일 거야....... . 그런 거야. 그걸 보러 오지 마. 그럴 필요가 없어...... .”
나는 내 생명을 가득 채웠던 광주리를
그 손님 앞에 내어 놓으련다
나는 그를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으니
-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죽음이 당신의 문을 두드릴 때> 부분
우리가 동사적 사유로 자신과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도 죽음이 왔을 때 시인처럼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 생명을 가득 채웠던 광주리를/ 그 손님 앞에 내어 놓으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