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사람들은 사는 곳에서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지.” 전철수가 말했다.
- 앙투안 드 생택쥐페리,『어린 왕자』에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불현듯 어떤 지난날의 추억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한순간 우리는 엄마 품에 안긴 아기처럼 행복해진다.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처음으로 고향을 떠났다. 향수에 젖어 하루하루를 지냈다.
어느 일요일, 친구들과 버스를 타고 교외에 나갔다. ‘헉!’ 고향의 산과 너무나 비슷한 산을 보았다.
나는 숨이 막혀왔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추억이라는 단어, 참으로 감미롭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지난날을 뒤돌아보게 된다고 한다. 감미로운 느낌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서일 것이다.
공원을 지나다 보면, 많은 노인들이 있다. 그들의 눈빛은 항상 먼 곳을 보는 듯하다.
아마 아득히 먼 지난날을 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현실은 차가울 뿐이다.
이렇게 과거를 헤매고 다니다 보면, 자꾸만 현실감을 잃어버리게 된다. 항상 술에 취해 사는 것과 같게 된다.
과거의 강렬한 추억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조용히 그 과거의 순간을 현재화해야 한다.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그때의 시간과 만나야 한다. 그러면 추억은 현재가 된다.
추억이 올 때마다 우리는 추억들을 현재의 시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오로지 현재에 머물러야 한다.
언제 어디에 있든지 우리는 감미로운 시간 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온몸의 감각을 깨우는 것이다.
깨어 있는 몸은 언제나 현재에 있다. 지난날의 강렬한 추억들도 현재에 머물게 한다. 시간은 사실 현재 뿐이다.
미하일 엔데의 소설 ‘모모’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사실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한 시간은 한없이 계속되는 영겁과 같을 수도 있고, 한순간의 찰나와 같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한 시간 동안 우리가 무슨 일을 겪는가에 달려있다. 시간은 삶이며, 삶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이니까.’
시간이 직선으로 일정하게 흐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이다. 아인슈타인이 얘기했듯 ‘시간은 상대적’이다.
한 시간이 영겁이 될 수도 있고, 찰나가 될 수도 있다. 우리의 삶에 따라 시간은 다르다.
우리가 현재에 집중할 때, 찰나는 영원이 된다. 이것은 명상을 해보면 체험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추억 속으로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 추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현재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삶 전체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삶이란 현재 그 자체이니까. 우리는 항상 현재에 살고 있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추억 속으로 들어가거나 미래로 도피한다. 우리는 ‘지금 여기, 살아가는 이곳’에서 만족해야 한다.
우리는 어디에 있건, 어디로 가건, 항상 ‘지금 여기’에 있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곳이 우리 삶의 전부다.
너의 눈빛 그 속에 나는 있다
미약한 약속의 생이었다
실핏줄처럼 가는 약속의 등불이었다
- 허수경, <나의 저녁> 부분
이 세상 어느 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한번 스친 인연들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함께 있다.
‘너의 눈빛 그 속에 나는 있다’
이것이 ‘약속의 생이고 약속의 등불’이다. 우리는 거대한 생명체 속에서 하나의 미약한 실핏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