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역전에서

by 고석근

영등포역전에서


어린 왕자는 사막을 가로질렀으나, 단지 꽃 한 송이를 만났다. 꽃잎을 셋 가진 꽃 한 송이, 아무것도 아닌 꽃 한 송이...... .


- 앙투안 드 생택쥐페리,『어린 왕자』에서



오랜만에 술에 취해 영등포역전 밤거리를 걸었다. 나는 환각 속에서 걷는 이 시간을 좋아한다.


마주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이 다들 정겹다. 그때, 지팡이를 짚고 절뚝이며 걷던 한 할아버지가 길을 물었다. “영등포역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나는 손가락으로 영등포역 쪽을 가리켰다. “저쪽이에요.” 나는 앞서가며 할아버지가 잘 따라오는지 뒤돌아보았다.


‘그런데, 저 할아버지는 내게 정말 길을 물은 걸까?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


오래전 새벽녘에 이 길을 가다 한 젊은이와 마주쳤다. 그는 내게 “담뱃불 좀 빌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했다.


나는 말없이 종종걸음을 쳤다. 인적 하나 없는 정적의 거리에서는 사람 만나는 게 무섭다!


지팡이를 짚으며 천천히 뒤따라오는 할아버지를 뒤돌아 보며, 산다는 것의 슬픔을 느꼈다.


무조건 사람을 경계하고 봐야 하는 이 시대의 사람살이, 모든 다른 사람은 잠재적인 범인이다.


오! 그런데 뒤따라오던 할아버지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나는 왁자한 사람들 속에서 망연히 서 있었다.


어디로 갔을까? 황량하다. 그렇다고 할아버지가 나타난다고 반가울까? 나는 지금 사막에 서 있다.


‘어린 왕자는 사막을 가로질렀으나, 단지 꽃 한 송이를 만났다. 꽃잎을 셋 가진 꽃 한 송이, 아무것도 아닌 꽃 한 송이...... .’


어린 왕자는 사막에서 여우를 만나 다른 존재와 관계 맺는 법에 대해 배우게 된다.


어린 왕자와 꽃 한 송이가 서로를 길들이게 되면, 둘은 서로에게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존재가 된다.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말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나와 저 할아버지는 언어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존재하게 했다.


그런데, 나는 저 할아버지를 경계해야 한다. 만인이 만인의 적으로 살아가야 이 시대가 너무나 고통스럽다.

그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면, 어딘가에서 많이 본 얼굴 같다. 어릴 적 고향에서 본 할아버지들의 얼굴 같다.

그 할아버지를 부축하고 어디 따뜻한 식당에 들어가 식사 한 끼 대접해 주고 싶다!


술기운이 만들어 낸 환상의 영등포역전, 나는 꿈을 꾸듯이 사람들과 건물들을 바라 본다.


나는 곧 88번 버스를 타고 나의 보금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잠시 후 비틀거리며 버스에 오른다.



거울 미로에 빠진 사람처럼 오늘 난 눈을 뜰 수가 없다

눈길 가는 데마다 전부 나다


- 김혜순, <현기증> 부분



가끔 우리는 현기증을 느낀다. 이 세상이 기우뚱 무너진다. 폐허가 된 자리에서 우리는 모두 만난다.


‘눈길 가는 데마다 전부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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