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움을 위하여

by 고석근

성스러움을 위하여


“의례가 뭐야?”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것도 모두들 잊고 있는 것이지.” 여우가 말했다. “그건 어떤 날을 다른 날들과 다르게, 어떤 시간을 다른 시간과 다르게 만드는 거야!”


- 앙투안 드 생택쥐페리,『어린 왕자』에서



원시인들의 의례를 보면, 끔찍하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그의 저서 ‘블리스로 가는 길’에서 다음과 같은 원시인들의 의례를 보여준다.


‘부족이 한자리에 모여 조상의 목소리를 낸다는 커다란 북을 치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한 소녀가 앞으로 나온다. 소녀는 거대한 통나무로 한쪽에 두 개의 기둥을 받쳐서 만든 비스듬한 지붕 밑으로 들어가 반듯이 눕는다.


그다음에 방금 성인식을 마친 십 대 초반의 소년들이 안으로 들어가 소녀와 차례로 첫 성관계를 갖는다.


마지막 소년이 들어가서 소녀와 완전히 한 몸이 되는 순간 사람들은 통나무 기둥을 빼낸다.


그들 위로 통나무가 떨어진다. 그들이 죽으면 시신을 끌어내 토막을 치고 요리를 해서 먹는다.’


조셉 캠벨은 이 의례의 목적은 ‘우리의 의식으로 하여금 삶이 죽음을 먹고 산다는 무시무시한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죽은 소년과 소녀는 신성한 힘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원시인들은 이 의례를 통해 삶을 긍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례를 야만적이라고 보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성찰해봐야 한다. ‘이런 의례를 행하지 않는 현대 문명인은 잘 살아가고 있는가?’


원시인들은 충격적인 방법으로 크게 깨달을 것이다. ‘산다는 건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다른 생명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원시인들은 우리처럼 함부로 다른 생명을 죽이지 않는다. 반드시 먹을 만큼 사냥을 한다.


먹고 나서 그 동물들이 다시 태어나도록 의례를 행한다. 우리 문명인들처럼 다른 동물을 마구 죽이고 비만이 올 때까지 먹지 않는다.


그들은 의례를 통해 아는 것이다. ‘생명은 생명을 먹으며 살아가고 죽어서는 다른 생명의 먹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생명의 신비다.’


우리는 이러한 ‘생명의 신비’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우리 문명인들은 극단적인 속물이 되어 버렸다.


삶의 성스러움을 잃은 현대인들은 온갖 정신질환에 시달리게 된다. 그렇다고 원시인들처럼 무시무시한 의례를 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의례의 정신을 되살릴 수는 있다. 나는 요가와 명상을 하며 이것이 현대인의 의례라는 생각을 한다.


어린 왕자가 여우에게 “의례가 뭐야?” 하고 묻자 여우가 대답한다. “그건 어떤 날을 다른 날들과 다르게, 어떤 시간을 다른 시간과 다르게 만드는 거야!”


요가와 명상을 하고 나면,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작은 나’에서 ‘큰 나’로 다시 태어난다


작은 나는 나만 챙기는 나다. 인간은 ‘나’라는 의식이 있어,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이 착각 속에서 살아가게 되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마구 해치게 된다. 그러고서도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나는 죽어야 한다. 원시인들이 의례를 통해 보여준 것이 바로 이것이다. ‘너도 하나의 생명이니 다른 생명의 먹이가 되어야 해!’


‘산다는 건, 서로의 생명을 나누는 거야! 크게 보면 모든 생명체는 하나의 생명인 거야!’


요가와 명상은 이것을 깨닫고 큰 나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하지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나라는 존재는 오만방자해진다.


어떻게 하면, 인류 전체가 큰 나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혼자 혹은 소수가 모여서 하는 요가와 명상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만일 이루어진다면,

자네는 마치

어려운 기상을 걷고

환하게 열린

휘영청한 가을 하늘을

우러르는 일과 같으리라.


- 박재삼, <하늘에서 느끼는 것> 부분



우리는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면, 모든 인류, 천지자연을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비로소 우리는 ‘하늘에서 느끼는 존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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