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없는 세대
여우가 말했다. “가령 오후 4시에 네가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갈수록 난 더 행복해질 거야. 4시가 되면, 벌써, 나는 안달이 나서 안절부절못하게 될 거야.”
- 앙투안 드 생택쥐페리,『어린 왕자』에서
‘약속’에 대한 나의 첫 충격은 30대 후반에 왔다. ㅈ 시민단체에서 활동가로 근무할 때였다.
한 활동가가 회의 시간에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큰일이 난 게 틀림없어. 어떻게 해야 하나?’
그와 자주 술을 마셨기에 그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었다. 그는 명문대 출신의 영민한 젊은이였다.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었다. 그의 입에서는 온갖 심오한 사회과학 지식들이 폭포처럼 쏟아져나왔다.
그는 특히 활동가의 ‘품성’을 강조했다. 시민단체의 활동가는 몸으로 규율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그에게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다음 날 그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봐도 허허 웃으며 별일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 뒤 나는 그와 유사한 경험을 술집에서 했다. 나는 초등학교 동창생인 그와의 약속 시간이 다가오자 설레기 시작했다.
사막의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기다림의 미학을 가르쳐 준다.
“가령 오후 4시에 네가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갈수록 난 더 행복해질 거야. 4시가 되면, 벌써 나는 안달이 나서 안절부절못하게 될 거야.”
하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똑딱 똑딱 시간이 흘러가고...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전화를 하자, 그가 잠에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응? 내가 그랬어? 어제 술을 많이 마셔서 꽐라가 됐어... 깜빡 잊었어... .”
‘깜빡 잊었다’는 말 앞에 나는 맥없이 나의 감정을 추슬러야 했다. 그의 억양 없는 목소리, ‘깜빡 잊었어.’
이런 일을 몇 번 겪게 되자 점차 나의 감정도 점차 무디어지기 시작했다. 어처구니없는 일 앞에서도 무덤덤한 마음.
이제는 약속 시간이 다가와도 설레지 않게 되었다. 그(녀)가 오면 오고 오지 않아도 괜찮은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볼프강 보르헤르트 작가의 ‘이별 없는 세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만나 서로 함께 지낸다. 그런 다음 슬그머니 도망친다. 우리에게는 만남도 없고 머무름도 없고, 이별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별 없는 세대다. 마음이 내지르는 비명을 두려워하며 도둑처럼 슬그머니 도망친다.’
‘마음이 내지르는 비명’이 어디로 갈까? 이 세상에는 사라지는 것은 없다. 떠난 것은 반드시 귀환한다.
우리 마음에 비명소리가 켜켜이 쌓인다. ‘소리 없는 아우성’ 우리는 항상 입을 꽉 다물고 있어야 한다.
언제 비명소리들이 마구 터져 나올지 모른다. 비명소리들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갈지 모른다.
내게 닿는 사람이 지르는 비명은
내가 인간에게 품고 있는 우정이
얼마나 그들에게 놀라움의 대상인가를
가르쳐 준다
- 오오오카 마코토, <불꽃의 노래> 부분
고대 그리스의 현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의 근원은 불’이라고 했다.
자신을 활활 불태우며 모든 것과 함께 타오르는 불, 우리에게는 아득한 불의 기억이 있다.
활활 타오르고 싶다! 남김없이 타올라 재가 되어 허공으로 날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