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쟁이를 위하여
“아! 아! 찬미자가 하나 찾아오는구나!” 허영쟁이는 멀리 어린 왕자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허영쟁이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찬미자로 보이기 때문이다. (...) 허영쟁이들은 칭찬하는 말밖에는 듣지 않는다.
- 앙투안 드 생택쥐페리,『어린왕자』에서
인간에게는 신성(神性), 신적인 마음이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정직하게 드러낼 수만 있다면 누구나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왜 역사적으로 신성이 깨어난 사람은 많지 않을까?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아서다.
우리는 남도 속이지만 자신도 속인다. 자신을 속이지 않고 살아가는 게 왜 이리도 어려울까?
‘허영심(虛榮心)’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나’라는 의식이 있어, 항상 ‘나의 위치’를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육체만 갖고 사는 게 아니다. 세상 속의 위치, 사회적 존재로 살아간다. 인간에게는 육체적 생명만큼 사회적 생명도 중요하다.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소중히 하는 마음, 얼마나 고귀한가? 하지만 이게 과하면 허영심이 된다.
아내는 나의 귀가 ‘팔랑귀’라고 한다. 누가 나를 조금만 칭찬하면 나의 귀가 팔랑거린다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유난히 허영심이 강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어릴 적 불우했던 환경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셋방살이를 하며 항상 주인집 눈치를 봐야 하는 예민한 아이는 항상 자신을 의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 후 가난한 집 아이는 학교에 들어가면서 더욱더 자신과 다른 아이들을 비교하게 되었을 것이다.
허영쟁이는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찬미자로 본다. 그의 귀에는 다른 사람들의 칭찬하는 말밖에 들리지 않는다.
20세기의 위대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끝까지 정직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건 허영심이 강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내면에 신성이 있어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기만 하면 되는데, 허영심의 안개가 신성을 가리고 있어 신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특히 허영심이 강했던 나는 나의 속마음을 꽁꽁 숨기고 살았다. 그야말로 생각하는 곳에 나는 없고, 생각하지 않는 곳에 내가 있었다.
나는 항상 땅에 발을 딛고 산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인문학을 공부하며 나는 나의 솔직한 마음을 만나기 위해 술에 취해 길게 길게 울었다.
그러다 내가 ‘말간 나’를 직면하게 된 것은, 크게 아프고 난 후였다. 죽음까지 가보니 내가 보였다.
나의 속마음이 투명하게 보였다. 나는 나의 신성을 보게 되었다. 선불교의 육조 혜능은 말했다.
“하나의 등불이 천년의 어둠을 사라지게 한다.”
켜켜이 쌓인 나의 허영의 먹구름, 죽음 가까이 간 나의 말간 마음의 빛은 허영의 먹구름을 뚫고 들어가 나의 신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동안 그리도 이해가 되지 않았던, 도덕경, 파우스트 같은 고전들이 그대로 이해가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어떤 행위든 거기에 조금이라도 허영심이 섞여 있다면, 유감스럽지만 행위 전체가 더럽혀지고 만다.”
우리는 누구나 신성이 있어, 척 보면 아는 통찰력이 있다. 그런데 너무나 강한 허영심이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다.
바위 틈새 같은 데에
나무 구멍 같은 데에
행복은 아기자기
숨겨져 있을 거야.
- 허영자, <행복(幸福)> 부분
우리의 신성이 깨어나기만 하면, 행복은 ‘바위 틈새’ ‘나무 구멍’ 같은 데서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보물찾기 놀이를 하는 아이처럼 마냥 즐거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