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이다
우리의 덧없는 삶 속에도 영원이 있다는 것이오. 우리로서는 혼자서 그걸 뚫어 볼 수 없다는 것이오. 우리는 나날의 걱정으로 길을 잃는답니다. 소수의 사람, 인간성의 꽃 같은 사람만이 이 땅 위의 덧없는 삶을 영위하면서도 영원을 살지요.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호모 데우스’에서 인류의 미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공은 야망을 낳는다. 인류는 지금까지 이룩한 성취를 딛고 더 과감한 목표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전례 없는 수준의 번영, 건강, 평화를 얻은 인류의 다음 목표는, 과거의 기록과 현재의 가치들을 고려할 때, 불멸, 행복, 신성이 될 것이다.”
인류는 지금까지 놀라운 성취를 이루어 왔다. 인류는 앞으로 어디로 가려고 할 것인가?
유발 하라리는 인류는 지금까지 이룩한 성취를 딛고 ‘불멸’을 향해 나아 갈 것이라고 예측한다.
인간과 신을 가르는 기준은 ‘죽음’이다.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인간)’로 진화한 인간은 이제 신을 넘보게 된 것이다.
인류가 ‘호모 데우스(신과 같은 인간)’로 진화하면, 어떻게 살아갈까?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죽음이다.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이 사라진 인간은 과연 행복해질까? 지금까지의 인간보다 더?
영국의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죽음의 고통’을 사라지게 하는 유토피아 프로젝트를 거부하는 한 야만인의 절규가 나온다.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인간의 고(苦)’를 해결하기 위해 야밤에 궁궐을 탈출한다.
그는 오랜 수행 끝에 인생의 대표적인 네 가지 고통, 생로병사(生老病死)를 해결한다.
그는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그는 어느 날 새벽에 보리수 아래서 크게 깨닫게 된다.
“생로병사는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생로병사의 고통은 ‘무명(無明), 어리석음’에서 온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의 깨달음은 현대 양자물리학으로 보면 지극히 과학적인 사유다. 양자물리학에서는 이 세상의 본질을 에너지장으로 본다.
우리가 물질로 지각하는 삼라만상은 물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감각이 에너지장을 물질로 지각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생로병사는 허상이다. 인간은 애초에 태어난 적이 없는 것이다.
태어나지 않았으니 늙고 병드는 것도 다 허상이 된다. 석가는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온전히 인생을 누렸다.
그는 ‘덧없는 삶’을 살면서도 ‘영원’을 살다 갔다.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이 세상을 물질로 보기에 쏜살같은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간다.
에너지장의 차원에서 보면, 찰나가 영원이다. 매 순간이 영원이다. 석가는 매 순간이 영원의 삶이었다.
인류는 앞으로 어떤 길을 갈 것인가? 과학의 힘으로 멋진 신세계의 신이 되어 살아갈 것인가?
하지만, 우리 안의 ‘야만성’은 인생의 모든 고통을 온전히 받아들이라고 하지 않을까? 인생은 신나는 소풍이니까.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 천상병, <귀천> 부분
누구나 죽을 때 깨달을 것이다.
‘소풍 왔다 가는구나!’
시인은 생전에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