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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석근 Feb 12. 2024

정오의 시간   

 정오의 시간     


 모든 것이 어긋났을 때, 자신의 영혼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그 인내와 용기를 시험해 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보이지 않는 강력한 적(혹은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혹자는 악마라고 부르는)이 우리를 쳐부수려고 달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부서지지 않는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유하 감독의 영화 ‘파이프라인’을 보았다. 보는 내내 나의 모든 감각이 깨어나는 듯했다.     


 일종의 범죄 영화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러한 ‘반사회적인 영화’에서 깊은 몰입감을 느끼게 될까?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일확천금을 노린다. ‘목표는 하나, 목적은 여섯! 화끈하게 뚫고, 완벽하게 빼돌려라!’     

 손만 대면 대박을 터트리는 도유업계 최고의 천공 기술자 핀돌이는 수천억대의 기름을 빼돌리기 위해 큰 판을 짠 대기업의 후계자 건우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핀돌이는 프로 용접공 접새, 땅속을 장기판처럼 꿰고 있는 나과장, 괴력의 인간 굴착기 큰삽, 이들을 감시하는 카운터와 하나의 팀을 짠다.     


 이들은 저마다 다른 목적을 가졌지만, 끝내 하나로 뭉치게 된다. 그들의 신나는 막장 팀플레이다.     


 유하 감독은 이 영화를 ‘비루한 루저들의 액션 카니발’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유하 감독의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루저들의 카니발,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왜? 파괴 그 자체이니까. 파괴는 신성한 창조를 낳으니까.     


 따라서 모든 파괴는 신성하다. 새는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 루저가 아니면 알 속의 안락함을 깨고 나오지 못한다.     


 우리 마음속의 루저가 영화 속의 인물들과 하나가 된다. 우리는 언제나 거듭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잠시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게 된다. 카잔차키스는 탄광 사업이 완전히 망했을 때, 극한의 희열을 맛보게 된다.     


 ‘모든 것이 어긋났을 때, 자신의 영혼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그 인내와 용기를 시험해 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그는 다 잃어버렸을 때, 온전하게 존재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      


 ‘보이지 않는 강력한 적(혹은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혹자는 악마라고 부르는)이 우리를 쳐부수려고 달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부서지지 않는다.’     


 이 시간을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라면 ‘정오의 시간’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림자가 없는 시간, 오직 환하게 빛나는 시간.     


 인생의 깨달음을 얻은 성현들은 죽을 때 말한다. “내 마음이 환하다.” 그들은 자신이 태초의 빛임을 느꼈을 것이다.     


 유하 감독은 현대의 물질문명에 대한 깊은 혐오감이 있을 것이다. 물질에 젖은 인간들의 군상을 보며 수없이 절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 마음이 파괴, 폭력의 카니발로 나타났을 것이다. 인도의 시바는 파괴의 신이다. 동시에 그는 춤의 신이다.     

 파괴와 창조의 끝없는 유희, 이것이 천지자연의 실상이다. 우리는 영화 파이프라인을 보며 ‘비루한 루저들의 액션 카니발’에 동참하게 된다.     


 우리는 잠시 잠깐 천지자연의 실상과 만나는 것이다. 번개가 치며 보여주는 이 세상의 말간 얼굴.     


 물론 우리는 영화가 끝나면 다시 ‘비루한 위너들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우리 안의 카니발은 언제고 이 허구의 세상을 전복하고 말 것이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 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 기형도,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부분           



 시인은 길 위에서 중얼거린다.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그는 끝내 자신을 무너뜨렸다.     


 인간은 자신을 파괴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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