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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석근 Mar 04. 2024

왕자와 거지   

 왕자와 거지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 뿐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는 모두 허깨비들이오. 나는 이 눈으로 보고 이 귀로 듣고 이 내장으로 삭여내어요. 나머지야 몽땅 허깨비지.      


 니코스 카잔차키스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는 서로 옷을 바꿔 입고 신분이 뒤바뀌어 벌어지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왕자는 거지 소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딱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네 옷을 입고 나가 신발을 벗어 던지고, 잔소리할 사람 없는 데서 실컷 진흙탕을 뒹굴 수만 있다면, 왕이 못 되어도 좋겠다!”     


 거지가 된 왕자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가까이서 보게 되면서, 자신이 돌보아야 할 백성들의 안타까운 현실을 잘 알게 된다.     


 그는 온갖 사건을 겪은 뒤, 거지 소년의 도움으로 왕좌에 오르게 된다. 그는 백성을 사랑하는 훌륭한 왕이 된다.     


 왕자가 계속 궁전에서 왕자로만 살았다면, 후에 훌륭한 왕이 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항상 남들이 떠받들어주는 삶을 살아가다 보면, 사람은 거기에 익숙해진다. 그게 당연하게 느껴진다.     


 우리 마음속에는 누구나 ‘거지’가 살고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고도 스스로 잘 살아가는 ‘생명성(生命性)’이다.     


 왕자로 살아가면 이 생명성이 약화하게 된다.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살아갈 수 있는 연약한 생명체가 된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는 완전한 무소유의 존재, 거지다. 그들은 언제나 당당하게 살아간다.     


 항상 자신의 생명성이 빛난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한껏 발휘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천지자연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나는 사극을 좋아한다. 아마 마음껏 나의 힘을 분출하지 못하니, 드라마를 보며 대리 만족하는 것 같다.     


 한 나라를 세운 왕이나 그를 보좌하는 훌륭한 참모는 한결같이 미천한 출신들이 많다.      


 거지가 되어봐야 훌륭한 통치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들을 거지로 길러야 한다.     


 자녀들에게 “왕자님! 공주님!” 하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 ‘거지의 의식’을 갖고 자라게 해야 한다.     


 그래야 온몸의 ‘촉’이 깨어난다. 야생의 감각이 깨어난다. 한 생명체로서, 한 인간으로서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조르바는 자신 안의 거지를 다 깨운 왕이다.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 뿐이기 때문이오. (...) 나머지야 몽땅 허깨비지.”      


 이 세상에 오로지 자신만이 실재하고, 나머지는 허깨비라는 것! 온전함 삶을 살아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왕자로 살아가고 있는가? 거지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 둘의 삶은 사실 한 사람의 삶일 것이다.     

 겉으로 왕자로 살아가는 사람은 안에 거지가 살고 있고, 거지로 살아가는 사람은 안에 왕자가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 두 삶을 자유자재로 변신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일 것이다.      



 시간이 나면 거지 같은 슬픔들이 우우

 몰려오겠지 더럽게 추근대며

 물고 늘어지겠지 내장까지 다 던져 주며

 가벼워질 수 있겠지     


 - 이상희, <시간이 나면> 부분           



 우리는 바쁘게 살아간다.     


 그러다 시간이 나면, 거지 같은 슬픔들이 우우 몰려온다.     


 이때 우리는 내장까지 다 던져 주며 그 슬픔들을 맞이해야 한다.     


 왕처럼 가벼워지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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