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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석근 Mar 05. 2024

자리이타(自利利他)   

 자리이타(自利利他)     


 있잖소, 인간은 짐승이오! 당신이 잔인하게 굴면 당신을 존경하고 두려워해요! 친절하게 대하면 당신의 눈알을 뽑아 가고요!     


 니코스 카잔차키스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어제 공부 모임에서 한 회원이 담담히 말했다. “이제 저 자신을 위해 살아가기로 했어요.”     


 오랫동안 교직에 몸을 담아온 중년 남성, 그는 언제나 남을 위해 살아가는 듯했다. 이제 그는 이타행(利他行)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우리는 이기주의자를 비난하고 이타주의자를 칭송한다.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선명하게 나눠질까?     


 이기주의와 이타주의가 정말 반대일까? 이 세상의 근본적인 이치는 ‘자리이타(自利利他)’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곧 남에게도 이익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이치를 잘 모른다.     


 자라면서 끊임없이 “착하게 살아라!”라는 말에 훈육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착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아니, 우리는 모두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갖게 되었다. 선(善)과 악(惡)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절대적인 선악은 없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선과 악이 절대적으로 존재한다는 믿음이 있다.       


 우리의 깊은 내면에는 그 믿음을 지닌 미숙한 아이가 있다. 이러한 미숙한 아이를 세상은 찬미한다.     


 ‘그 사람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할지는 몰라도, 사람은 성숙을 멈추게 한다.      


 칭찬은 자극에만 반응하는 미숙한 인간으로 만든다. 스스로 판단하는 힘을 잃어버리게 한다.     


 나도 오랫동안 ‘착한 아이’로 살아왔다. ‘세상 사람들이 나만큼만 착하게 살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텐데.’       

 ‘이만큼 주면 최소한 반은 돌아올 거야!’ 하지만 전혀 돌아오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술에 취하면 내 안의 아이가 마구 울부짖었다. 떼쓰는 아이였다. 그러다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나를 알아가게 되었다.     


 ‘착한 어른이 아니라 미숙한 어른이었구나!’ 미움받을 용기를 갖고 나를 성숙시켜왔다.     


 머리로 익힌 공부는 정신의 성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방해물이 된다.      


 조르바는 일꾼들에게 착한 주인이 되려는 카잔차키스에게 호통을 친다.     


 “있잖소, 인간은 짐승이오! 당신이 잔인하게 굴면 당신을 존경하고 두려워해요! 친절하게 대하면 당신의 눈알을 뽑아 가고요!”     


 일꾼들을 짐승으로 대하는 조르바는 갱도 사고가 일어날 때, 많은 일꾼을 구하게 된다.      


 몸으로 살아온 조르바의 민감한 감각 덕분이었다. 우리는 섬세해져야 한다. 섬세한 감각만이 자리이타행을 할 수 있다.     


 우리의 내면에는 천지자연과 하나인 마음이 있다. 머리로 익힌 도덕률은 이 마음을 가려버린다.     


 우리의 영혼은 곧 몸이다. 몸은 천지자연과 하나의 파동이다. 이 세상의 이치를 다 알고 있다.  



 사람을 그리워해 봐야

 영혼에 파문이 생기는 거죠

 사람 때문에 죽고 싶고 사람 때문에 살고 싶어 봐야

 영혼에 파문이 생기는 거죠     


 - 이경임, <호수> 부분           



 ‘사람을 그리워해 봐야’     


 영혼에 파문이 생겨난다.     


 나와 온 우주가 하나의 파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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