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석근 Mar 09. 2024

나는 생각하는 곳에 없다   

 나는 생각하는 곳에 없다      


 내 삶은 실패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펀지 하나를 들고서 그동안 읽은 모든 것을,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조르바의 학교에 다시 들어가 위대하고 진정한 알파벳을 배울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전혀 다른 길을 갔을 것이다! 내 오관과 피부 전체를 완벽하게 갈고닦아 즐기고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을 것이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공부 모임 시간에 한 회원이 울먹였다. “남편이 내게 청혼을 하면서 나를 평생 사랑하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런데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요... .”     


 다른 회원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영화 ‘봄날은 간다’의 한 대사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런데 이게 사랑의 문제인가?’     


 이 회원의 문제는 ‘영원한 사랑? 변하는 사랑?’이 아니다. 그 회원의 ‘생각’이다. 우리는 생각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생각을 존재의 차원으로 끌어 올렸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우리는 학교에서 데카르트의 이 명제를 철저하게 배우고 익혔다. 드디어 우리는 ‘생각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 회원은 자신의 생각 속으로 남편을 집어넣었다. “남편은 나를 평생 사랑한다고 했어!”     


 이 한 생각이 온 온주를 가뒀다. 그런데 남편이 그녀의 생각 속에서 자꾸만 벗어나려고 한다.      


 그녀의 거대한 생각의 성곽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녀는 견딜 수 없다. 자신의 온 우주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하루빨리 그녀의 성에서 탈주해야 한다. 그 성에서 벗어나고 나면 보일 것이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말했다. “나는 생각하는 곳에 없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 있다.”     


 그녀의 눈에 말갛게 보이는 남편, 그녀는 이제 한 인간으로서의 남편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비로소 자신과 남편을 감싸고 있는 사랑을 보게 될 것이다. 자신과 남편의 전 생애가 훤히 보일 것이다.       


 근대사회는 데카르트의 철학에 의해 건설되었다. 근대사회는 생각하는 인간에 의해 파국을 맞게 되었다.     


 인류사에서 유례가 없는 양차 세계대전과 인류의 종말을 향해 진행되고 있는 기후 위기, 이제 우리는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우리는 생각의 감옥에서 벗어나야 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말했다. “나는 사유하는 존재 이전에 행위하는 존재, 즉 몸(body)적 존재다.”     


 그렇다. 인간은 온몸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생각은 몸의 또 다른 일면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몸이 전부다. 오로지 머릿속의 지식(생각)으로 살아온 카잔차키스는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회심을 한다.      


 ‘내 삶은 실패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펀지 하나를 들고서 그동안 읽은 모든 것을,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조르바의 학교에 다시 들어가 위대하고 진정한 알파벳을 배울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전혀 다른 길을 갔을 것이다! 내 오관과 피부 전체를 완벽하게 갈고닦아 즐기고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을 것이다.’ 


         

 알맹이들의 과잉에 못 이겨 

 방긋 벌어진 단단한 석류여, 

 숱한 발견으로 파열한 

 지상의 이마를 보는 듯하다!


 - 폴 발레리, <석류> 부분            



 삼라만상은 자신의 과잉을 견디지 못한다.     


 펑 터진다. 빅뱅, 천지창조다. 천지창조는 늘 진행 중이다.        


 ‘방긋 벌어진 단단한 석류여,’                                                             

작가의 이전글 우리는 자신부터 구해야 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