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하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내 속에서 솟아오르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 헤르만 헤세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마지막에 가서 구원을 받는 파우스트를 보고 많은 사람들은 의아해 할 것이다.
“뭐야? 지옥에 가야하지 않아?”
괴테는 이런 의문을 품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노력하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그럼 노력하면 누구나 다 구원을 받는 거야? 그런데 어떻게 노력해야 해? 막막해진다.
독일의 문호 헤르만 헤세는 그의 저서 ‘데미안’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속에서 솟아오르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내 속에서 솟아오르는 것, 이것으로 끝까지 살아가는 것. 괴테가 말하는 노력은 바로 이것이다.
파우스트 박사는 그 당시 최고 학문의 경지에 올랐음에도, “도무지 기쁨이 없구나!”하고 절망한다.
공부를 많이 하면 행복하게 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파우스트는 왜 대학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해져버렸는가?
바로 이성(理性) 중심의 공부였기 때문이다. 서양의 18세기는 이성의 꽃이 활짝 피어날 때였다.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에 의해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며 인간은 자신의 이성에 대해 절대적인 신뢰를 보낼 때였다.
하지만 작가인 파우스트는 예감한다.
이성으로 지은 성은 겉보기에는 화려해보여도 모래성이다. 한순간에 무너진다. 양대 혁명으로 건설된 산업자본주의는 엄청난 물질적 성과는 이루었지만, 1,2차 대전을 불러오고, 심각한 기후위기를 불러왔지 않은가?
파우스트의 통찰력은 이성의 제국의 미래를 내다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성을 버리고 욕망, 감정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의 내면에서 가라고 하는 곳으로 그는 돌진하는 것이다. 그의 앞에는 온갖 죄악이 쌓인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는다.
‘노력하는 자는 방황한다.’ 그는 방황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파우스트는 헤르만 헤세의 저서 ‘데미안’에서 싱클레어로 나타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내면의 소리다. 그의 소리를 들으며 싱클레어는 쉼 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파우스트는 또한 그리스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저서 ‘조르바’에서 조르바로도 나타난다. 조르바는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하는 최고의 인간, ‘아이’다.
그는 아이처럼 몸으로 살아간다. 오로지 앞만 보며 나아간다. 아이처럼 과거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현재만 있을 뿐이다.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억누르며 이성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이들의 구원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고 욕망과 감정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욕망과 감정이 자본주의에 포섭되어 있는 경우다.
자본주의는 엄청난 생산력으로 우리에게 마음껏 욕망을 누리라고 한다. 하지만 그건 속에서 솟아올라오는 욕망이 아니다. 밖에서 주어진 것들은 나의 욕망이 아니다.
괴테는 신이 죽은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주었다. ‘아이의 마음’이 되면 그의 가르침이 너무나 쉽게 와 닿을 것이다.
당신은 내가 드린 마음을 귀여운 장난감인 양
조그만 손으로 가지고 놀 뿐,
내 마음 고뇌에 떨고 있는 걸 살피지 않네.
- 헤르만 헤세,《아름다운 사람》부분
우리는 ‘내 마음을 왜 몰라줘?’하는 말을 가끔 듣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아주기 위해 그와 결혼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잘 살아갈까?
시인은 안다. 내가 드린 마음을 귀여운 장난감인 양 갖고 놀 뿐, 내 마음 고뇌에 떨고 있는 걸 살피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것을.
자신의 마음을 소중히 하는 사람만이 구원받는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