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
자기실현은 ‘자아’가 무의식 밑바닥 중심 부분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 소리를 듣고 그 지시를 받아 나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 칼 융
아이들이 어릴 때는 고향에 네 번을 갔다. 추석, 설날, 여름 방학, 겨울 방학. 8명의 사촌들이 엉켜 놀았다.
어느 날 나는 동생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아이들이 싸우더라도 우리 어른들은 개입하지 말자. 자기들끼리 어울려 지내는 법을 배우게 하자.”
만장일치로 나의 제안이 받아들여졌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자기들의 질서를 아직 만들지 못해, 우리들에게 와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크게 웃으며 술잔만 주고받았다. 악을 쓰며 울던 아이들도 할 수 없이 저희들 무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혼돈 속에서 질서가 잡혀갔다. 형은 형답게 아우를 돌볼 줄 알았고, 아우들은 형을 따르게 되었다. 위험한 곳은 형들이 아우들을 보호해 주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임을 알아가게 되었다.
인간도 사회적 동물이라 함께 어울려 지내는 본능을 타고 난다. 그 본능으로 만들어 가는 질서는 아름답다.
어른들은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아 약육강식의 논리로 살아간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것을 모른다. 자신안의 하늘의 명령을 따를 뿐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내는 방법을. 일찍이 ‘나의 길’을 가보게 하고 싶었다.
심층심리학자 융은 말했다. “자기실현은 ‘자아’가 무의식 밑바닥 중심 부분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 소리를 듣고 그 지시를 받아 나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자아’는 세상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나다. 이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연극하는 배우다. 아버지, 어머니, 남자, 여자, 팀장, 사원...... .
‘자기’는 우리 안이 영혼이다. 우리의 가장 깊은 무의식 속에 보석처럼 있다. 이 자기는 우주와 통하는 마음이다. 우리 안의 신이다.
인생의 목적은 자기실현이다. 자신의 영혼을 활짝 꽃 피우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리의 자아는 항상 자기의 명령을 들으며 살아가야 한다.
항상 하늘의 명령(天命)을 두려워한 공자처럼. 내면의 신의 소리에 따라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처럼.
이런 내면의 소리는 삶 속에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마음을 고요히 하면 누구나 내면의 소리(양심)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바쁘게 살다 보면 내면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영어 단어 직업 Calling, vocation에는 부르다(Call), 목소리(voice)라는 뜻이 들어가 있다. 직업은 신의 뜻, 소명이라는 것이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어릴 적 경험으로 신의 소리를 따르는, 자기실현을 할 수 있는 직업을 갖기를 바랐다.
우리는 동물세계는 약육강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강자인 사자를 보자. 그는 약자인 초식동물들을 잡아먹는다. 그러면 초식동물은? 더 약자인 풀을 뜯어 먹는다. 풀은? 더 더 약자인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할까?
사자가 죽으면 그의 몸은 풀들의 먹거리가 된다. 그러면 풀은? 강자인가? 약자인가? 삼라만상의 실상은 서로를 살리는 상생이면서 서로를 죽이는 상극이다. 크게 보면 서로의 몸을 나누며 살아간다. 강자도 약자도 없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상생, 상극의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자신의 소명을 아는 것이다. 자신을 알고 나아가야 할 길을 아는 것이다.
보르헤스의 소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는 가상의 행성, 틀뢴이 나온다.
틀뢴에서는 명사를 쓰지 않는다. 동사, 형용사를 쓴다. 명사를 쓰게 되면 명사가 지시하는 대상이 실재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내리는 비를 보고 비라고 하면 비라는 게 실재하는 것 같다. 비는 사실 하늘에서 내리는 물이기에 동사다.
사람도 그렇다. 나라는 말을 쓰게 되면 나는 실재하는 것 같다. 나라는 존재는 항상 움직이거나 어떤 외양을 띈다. 동사, 형용사다.
인간은 자아가 있어 자아를 진짜 나로 알고 살아가기 쉽다. 사는 게 신이 나지 않으면 자아 중심, 명사로 살아서 그렇다.
자기는 우주와 하나의 마음이라 항상 춤을 춘다. 자기를 진짜 나로 알고 살아가면 삶이 신난다. 신명이 난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내가 그리워집니다.
- 윤동주,《자화상》부분
시인은 우물에 비친 나를 본다. 인간은 자신을 보는 순간,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된다.
‘나의 길’을 가게 된다.
어떤 고난을 겪더라고 그 길을 가게 된다. 자신의 신화를 만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