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적당히 달고 적당히 쓴 커피처럼

바닐라라테

by 빛해랑

"디카페인 바닐라 라테 주세요." 따뜻한 디카페인 바닐라 한 잔을 주문했다. 부드러운 커피 향에 얼었던 몸이 녹아내린다. 적당히 달콤하고, 적당히 쓰다. 내 삶과 닮은 듯도 하다.

젊은 시절엔 다방커피 맛 나는 믹스커피를 달고 살았다. 추울 때 발 동동 구르며 자판기에서 뽑아먹는 그때의 커피 한 잔은 작은 행복이었다.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커피가 거북했다. 임산부에게 좋지 않으니 마시지도 않았지만 몸이 음식을 거부했던 입덧 탓이 더 컸다. 맥주 한 잔은 가끔 생각났지만, 매일 두세 잔 이상을 먹었던 커피는 생각만 해도 속이 불편했다. 입덧할 때의 그 기억 때문에 오랫동안 커피와 거리를 두었다. 가끔 한 잔씩 마실 때면 잠이 오지 않았다. 몸이 카페인에 반응한 것이다.


대신 녹차를 마셨다. 녹차에도 카페인이 있지만 수면하고는 상관이 없었다. 카페인 적용 방식이 달라서라고 알고 있다. 녹차의 카페인은 진정 효과가 있고, 천천히 흡수되지만, 커피의 카페인은 각성효과가 더 크고 빠르게 흡수돼서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제는 디카페인이라는 선택지가 생겼다. 요즘에는 다양한 음료가 많지만 예전에는 커피 말고 내가 고를 수 있는 것은 시판 맛이 나는 간편한 종류의 차나 주스였다. 물 말고는 마시는 즐거움이 내게 없었다. 다행히 지금 내 앞에는 카페인 없는 커피가 있어 행복하다.


아침 출근을 서둘렀더니 시간이 여유로웠다. 달콤 쌉싸름한 디카페인 바닐라 라테를 마셨다. 단맛이 싫었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달콤한 맛에 행복을 느낀다. 사람의 입맛은 변하게 마련이다. 커피 한 잔에 하루를 시작할 힘이 생긴다. 단지 커피 한 잔일뿐인데 많은 생각들이 온다.


본업에 충실하다 보면 자기 계발에 쏟을 에너지가 부족할 때가 있다. 약한 나는 휘둘리고 휩쓸리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씩 알아간다. 적당히 달고 적당히 쓴 커피처럼 모나지도 튀지도 않은 내 모습 그대로가 나답다는 것을. 여러 꽃들 속에서 나답게 피어나는 꽃이면 충분하다. "인생 뭐 있냐!" 누구는 말하지만 인생에는 이렇게 소소한 행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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