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표지의 슬아는 가녀장답게 종이신문으로 만든 왕관을 쓰고 있다. 눈빛은 깊고 날카롭다. 꼭 다문 입술, 발그레한 볼에서 철저한 자기 관리가 느껴진다. 한 손에 들려있는 전자담배조차 복희와 웅이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성공한 사람은 달라" 보인다.
가녀장의시대 이슬아
P190 어쩔 땐 태어나서 기쁘고 때때로 슬프기도 하다. 태어났던 순간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뭔가 신기하고 당황했을 것 같다. 이런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도 태어나서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다시 태어난다면 나로 태어나고 싶다.
슬아의 글쓰기 수업 제자인 아홉 살 이안이의 글짓기 내용이다. 아홉 살 아이의 생각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철학적이다. 무엇보다 자기 객관화를 잘했다. 다 옮기지는 않았지만 이안이는 태어나서 좋은 점과 태어나서 안 좋은 점을 명료하게 표현할 줄 안다.
반백년을 산 나보다 낫다. 난 아직도 모르겠더라. 태어나서 왜 좋은지, 왜 안 좋은지를. 역시나 아이의 심성은 맑고 투명해서인가. 그것을 답하기엔 너무 많은 걸 겪어버린 내 탓도 있으려나.
순수한 아이는 다시 태어나도 나로 태어나고 싶다고 한다. 이유 또한 걸작이다."내가 언제나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내가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라고.
솔직하게 말하면 다시 태어난다면 다르게 태어나고 싶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만약에 말이다. 사실 만약이라는 것은 없지만 그래도 다시 태어날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로 태어나고 싶어요" 따위의 말은 하지 못할 것 같다.
아홉 살짜리 꼬마 아이와 생각을 견준다는 것이 우습기도 하지만 이안이의 글짓기 수업 주제가 예사롭지 않아서다.
슬아의 엄마가 이안이의 발표 글을 듣고 눈물을 흘린 건 정말 아름다운 글 때문이었을까. 나와 비슷한 마음에서였을까.
아이의 글 내용 중 나는 왜 태어난 걸까?라는 질문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난 이유가 있다고 한다.
내가 태어났을 때 종갓집 종손이었던 집안에 내리 딸이 태어나니 우리 할머니는 강보에 감아진 나를 두 손으로 멀리 밀어내셨다 한다. 그런 시어머니가 야속했는지 엄마는 두고두고 서운했다고 말씀하셨다.
가난한 육 남매의 막내딸일망정 아버지는 내가 이뻐서 이름도 특별하게 지으셨다. 위로 오빠가 있고 아래로 남동생이 있어서인지 늘 사랑받고 자란 느낌이다.
내게 아버지는 남다르다. 유독 이뻐하셔서도 그렇지만 나를 존중해 준 유일한 분이셨기에.......
내가 태어난 이유가 그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살라는. 내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보다 먼저 돌아가신 어머니의 빈자리 때문에 무던히도 외로움을 타신 아버지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추울까 봐 목도리를 자꾸 여며주시고, 3월인데도 눈바람이 날리던 그날 꽃샘추위에 꽁꽁 언 손을 비벼주시던 아버지. 결혼식이 끝나고 "네 아버지가 하염없이 울더라"라며 고모가 전한 말을 듣고 신혼여행 가는 비행기 안에서 흐르는 눈물을 삼키던 내 모습이 어제일 같다.
나를 아끼고 소중하게 돌보는 것이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조금이라도 갚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