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6시 부스스 눈을 뜨며 일어납니다. 간밤에 늦게 잠이 든 탓에 체온이 남아있는 잠자리를 벗어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어머님 생신을 챙겨야 하는 날입니다. 진짜생신은 일주일 후나 되었지만 우선순위(직장업무)에 밀려 앞당겨 챙겨드리기로 하였습니다.
출발하면서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립니다."요즘엔 주말만 되면 비가 오는 것 같아" 빗길 운전이 예상되니 남편이 다소 예민해집니다. 떡집에 들려 어머님 좋아하시는 영양떡을 종류별로 샀습니다. 어머니 나이 구순이건만 여전히 떡을 좋아하십니다. 밥은 밀어내도 떡은 마다한 적이 없으시거든요. 비를 머금은 초목들을 눈에 담으며 어머니의 한적한 시골집을 어린아이 소풍 가듯 설레는 맘으로 갑니다.
"어머니 아직 따뜻하네요. 따뜻할 때 드셔 보세요""가루로 만든 음식은 안 먹으련다" "네? 왜요? 어머니 떡 좋아하시잖아요" "좋아했는데 가루로 만든 음식은 먹지 말라해서. 몸에 안 좋다고...." "아~~ 저는 여전히 좋아하실 줄 알고.... 그럼 수박이라도 잘라올게요" "수박도 안 먹으련다 자르지 말고 고대로 뒀다가 얘들 가져다줘" "네에~~? 수박도? 수박은 왜요. 드시기에 부드러운 과일로 사 왔는데?" " 단것도 먹지 말라더라. 몸에 안 좋다고...." 시쳇말로 할많하않(할 말은 많은데 하지 않는)이었습니다. 소식해야 좋다시며 밥은 안 드시고 국과 제철반찬만 조금 드십니다.
우리 어머니는 구순에 건강다이어트를 하시는 건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하기만 합니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스님들이나 드실법한 사찰 음식 같은 음식을 고집하지 않으셨는데 말입니다. 건강에 필사적인 모습을 보이시며 좋아하던 롤 케이크, 영양떡, 수박을 안 드신다니 당황스럽기만 합니다. 이쯤되니 배려하지 못한 내가 부끄럽고 죄송하기까지 합니다.
"늙으면 빨리 가야지. 사람이 이제 농해져서 쓸데가 없다. 얼른 죽는 것이 답이여~" 입버릇처럼 말씀은 하시지만 마음은 더 사시고 싶으신가 봅니다.
감사했습니다. 이제는 얼마나 사시겠나. 늘 조마조마하며 그저 자식얼굴 한번 더 보고 살아생전 먹고 싶은 거 맘껏 먹게 해 드리는 것이 왜 효도라고 생각했을까요. 며느리의 짧은 식견은 속 깊은 어머니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건강을 지키시는 어머님 덕분에 자식은 걱정 없이 본업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건강이 자식을 도와주는 거라는 생각으로 사셨던 겁니다. 부쩍 건강한 음식에 신경을 쓰는 것도 그렇고. 매일 보행의자를 의지해 운동을 빼놓지 않는 것도 그러했습니다. 여전히 당신의 깊은 자존감을 가늠하지 못하는 못난 며느리입니다.
저녁식사 후 잠시 책을 들여다보니 어머니가 말씀하십니다."공부하냐" 아. 아니에요. 그냥 책 좀 잠깐 보는 거예요." 많이 해라 공부는 아무도 뺏어 가지 못하는 거야"
배움을 누구보다 높이 사는 어머니십니다. 공부와 배움을 최우선순위로 치는. 체구는 초등학생처럼 작지만 속은 단단한 알맹이인 지혜로우신분. 부잣집 외동딸로 그야말로 세숫물도 떠다 주는 물로 세수했다는 어머님이 가난한 밤나무집으로 시집온 뒤 겪은 고초는 듣고도 믿지 못할 만큼 스토리가 깊습니다. 당신 나이 예순셋에 그렇게 좋아하던 남편(시아버지)을 떠나보내고 홀로 구순까지 살아내신 밤나무집 며느리였던 내 어머니. 조용히 강하다는 표현이 딱 맞는. 겉으론 한없이 여려 보이지만 강단과 심지가 빳빳한 분입니다, 저 또한 그런 어머니의 밤나무집 며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