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즐거움은 계속되어야 한다
세상은 넓고 배우고 싶은 것은 많다
겨울이 온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바빠진다. 월동을 준비하듯 집안 이곳저곳을 괜히 살피게 된다. 베란다에 쌓아둔 헌 옷가지를 버리면서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기타 세 개를 보았다. 두 개는 클래식 기타이고 하나는 일렉기타다. 먼지가 두껍게 내려앉도록 방치된 기타 주인에게 잔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꾹꾹 눌러 참으며 친절을 가장한 한마디를 했다." 유이야 저 기타는 언제쯤 다시 시작할 거니?" 속마음은 '저렇게 둘 거면 중고 시장에 팔자!'였다.
딸 유이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좋아했다. 자식의 공부 문제로 속을 끓이거나, 걱정을 달고 산다는 부모를 본 적이 있다. 다행히 공부만큼은 스스로 욕심을 부리며 하는 아이라서 고마울 때가 많았다. 오히려 부모인 내가 자식에 관한 공부 욕심이 없었다. "그만하면 됐지!"의 마음으로 살았던 것 같다. 세상엔 공부만큼이나 의미 있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공부밖에 모를 것 같은 딸에게도 인생의 즐거움은 있다. 바로 기타다. 일렉트릭 기타가 유이의 취미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도 포기하지 못하고 집에서 두 시간 거리의 레슨을 받으러 가곤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고관절 통증 때문에 취미인 기타가 멈춰져 있는 상태다. 묵직한 기타를 어깨에 걸치고 서 있기가 힘든 까닭이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했던 유이는 7살 때 처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피아노 선생님으로부터 "어머니 유이가 절대음감이 있고, 청력이 뛰어나네요."라고 들었다. 그때만 해도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인 나도 모르는 사실이었으니까. 음을 하나씩 들려주거나 혹은 여러 개의 음을 동시에 들려주면 귀로 듣고 음을 짚어냈다.
피아노를 곧잘 쳤고 배우는 속도도 빠른 것 같았다. 피아노 선생님이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무리하게 레슨을 시키고. 한 시간이던 수업 시간을 훌쩍 넘겨도 끝마쳐 주지 않자, 딸은 피아노 시간을 싫어하기 시작했다. 선생님과 딸의 신경전 끝에 피아노는 3년으로 만족했다. 무엇이든 즐거워야 오래 한다.
마음먹은 것은 뜻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딸은 그렇게 피아노에서 바이올린으로 옮겨갔다. 2년 정도 배우던 어느 날 바이올린 선생님이 홀연히 영국으로 유학을 가버렸다. 유이를 가르쳐 줄 만한 바이올린 선생님이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딸은 바이올린을 계속 원했지만 단지 취미로만 생각했던 나는 딸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바라봐 주지 않았다.
악기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유이는 중학교 때 플루트를 배우고 싶어 했다. 돈은 들지만 배우고 싶은 마음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나는 낙원상가를 뒤지고 뒤져 중고 플루트를 샀다. 중고라고 했지만, 가격을 들었을 때 놀라 나자빠질 뻔했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플루트는 대학 때까지 이어졌다. 밴드 동아리에서 플루트 연주를 하고 지역 행사 같은 곳에 자주 가기도 했다.
이제는 일렉기타에 빠졌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으로 클래식 기타를 배우기도 했었다. 그래서 기타가 세 개인 것이다. 과학을 좋아하는 유이에게는 단지 취미를 위한 악기들이었다. 악기를 유랑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딸이나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누구나 즐겁게 살 권리가 있다.
자신의 인생을 음악으로 선택하지 않은 이상 하나의 악기만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넓고 배우고 싶은 것은 많다. 비록 먼지 쌓인 기타를 보면서 욱하고 감정이 올라왔지만, 딸이 더 많이 경험하고, 더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본다. 그래도 악기는 일렉기타가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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