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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빛나 Nov 03. 2024

29. 충분히 기다려 주어서 그렇다

익어가는 계절

풍성한 수확의 계절 가을이다. 내가 사는 집 주변에는 감나무. 대추나무, 보리수가 가을볕에 익어가고 있는 요즘이다. 아침 출근길에 한 번 올려다보고, 저녁 퇴근길에 다시 인사하듯 쳐다봐진다. 파란 가을 하늘 아래 주렁주렁 달려있는 그것들을 보면 내 것이 아닌데도,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부자가 되는 기분이다. 나무 주인의 행복한 마음이 느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예전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아이들과 밤을 따러 가거나 고구마밭, 무, 배추밭에서 체험하기를 즐겨했었다. 고구마 줄기마다 달려 나오는 붉은 고구마를 보면서 소리 지르며 감탄하는 사람은 아이들이 아닌 나였다. 진짜 고구마 밭주인이라도 되는 듯 뿌듯한 기분이었고, 잔뿌리와 꼬리는 떼어낸 후에 상자에 인심까지 넘치게 담아 오곤 했다.

강원도의 고랭지 배추밭에 갔을 때도 그랬다. 조금 과장하면 돌쟁이 아가만큼은 되는 배추의 무게에 감탄했다. 한 포기만 가져가도 한 달은 먹지 않을까 할 정도로 크고 튼실한 배추를 체험으로 수확했었다. 어렸을 때  내 집의 배추를 숱하게 보고 자랐어도 어른이 되어 도시에 살면서 남의 집의 배추가 신기해 보인다는 사실이 더 신기했다.

언젠가는 시골 어머님 댁에 다녀오는 길에 사과밭을 지나게 되었다. 탐스럽게 열린 사과를 보고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었다. 마침 사과밭 주인은 사과나무에 사다리를 놓고 있는 모습이 보이기에 무작정 들어가서 사과를 구매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거절당할 줄 알았지만 흔쾌히 허락하더니 더 놀라운 제안을 했다. 사과나무 한 그루를 통째로 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니 사과나무를 사다니!" 금시초문의 말에 흥분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주인장의 말로는 사과나무 한 그루를 돈으로 계산하면 그 나무에 달린 사과를 몽땅 따서 가져올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단 따는 건 우리 가족 몫이라고 했다. 그 신기한 경험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가장 맛있어 보이는 사과나무를 샀고, 한 알씩 따서 커다랗고 노란 상자에 채우는 기쁨이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가을이 되면 마음만은 늘 그 사과밭으로 달려간다.

어제는 친정 언니 집 마당에 있는 세 그루의 감나무에서 감을 땄다. 철물점에서 감을 따는 막대기를 판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잠자리채 모양과 비슷하다. 길이를 조절할 수 있는 기다란 막대기에 작은 양파망 같은 것이 매달려 있어서 감을 넣고  한두 바퀴 돌리면 망 안으로 쏙 담기는 재미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내가 어렸을 적 시골에서 자랄 때는 못 보던 신문물이다. 어릴 적에 우린 나무에 올라가서 따거나 흔들어서 떨어지게 만들었다.  장대 같은 것을 이용해서 쳐내는 걸 본 적은 있었다. 감 따는 막대기는 한 번에 여러 개를 딸 수는 없고 한 개씩만 따야 하는 번거로움은 있지만 감을 따서 하나씩 손에 만져보는 느낌이 간질간질했다. 부지런한 농부가 자신이  봄부터 가꾼 열매를 수확하는 뿌듯함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대여섯 개를 따고서는 "아이고 힘들어.! 소리가 나왔다. 체력 좀 키워야겠다. 마트에서 팔던 감의 색깔과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 내가 샀던 감은 주로 단감이고, 살짝 푸릇할 때 시장에 나오는 것이고, 나무에서 딴 감은  충분히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따주어서 그럴 것이다.

충분히 익었지만 만져보면 푸른 감 못지않게 땡땡하고 단단함이 느껴졌다. 살아있는 듯한 원색의  주홍빛을 띠는 감처럼 익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봄부터 씨를 뿌려 가꾸고, 수확하는 농부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나무의 열매처럼 나도 익어간다. 글을 쓸 때도 차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여유가 필요하다.  낮게 더 낮게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익어갈수록  '겸손하고 낮은 사람이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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