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번 벗어봐요, 네? 내가 장담한다, 진짜."
이 무례한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나는 선뜻 대꾸하지 못하고, 애매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나는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게 어렵다. 그렇다고 성격이 고운 건 아니어서, 한번 입을 털면 상대방 눈에 눈물이 쏙(?) 맺히게 할 수 있긴 하다. 단지 그 한 번을 참고 조심스러워하는 편일 뿐이다.
이러한 성향은 어쩌면 곱게 자란 딸내미이기 때문에 갖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인생을 살며 타인과 크고 작은 갈등이 생길 때마다, 엄마는 나를 이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냥 넘겨. 괜히 싸워서 좋을 것 없다. 그런 사람 상대하면 똑같은 사람 되는 거야."
마치 반야심경 같은 가르침이다. 왜 밥을 공짜로 얻어먹느냐고 욕한 어느 브라만에게, '당신이 저한테 한 욕을 제가 안 받으면 그 욕이 누구의 것인가요?' 하며 대응한 부처님 같은 대처이다.
요 몇 년간 유행했던 베스트셀러들은 그래도 의사 표시는 하라고 한다. '이대로 나여도 괜찮아'류의 자존감 지킴이 책들이 유행하며, 동시에 '예의 바르게, 흥분하지 말고, 하지만 할 말은 하며 살자' 같은 분위기가 생겼다. '무례한 자에게 더 큰 폭력으로 응징해주세요!' 보다는 훨씬 낫지 않나? 이론적으로도 맞고,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서라도 무조건 필요한 사회 풍조이다.
무시하던가, 단호하게 대응하던가. 모두 지혜로운 방법들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게 꼭 나에게 맞다는 보장은 없다는 걸 깨닫게 된 사건이 있었다.
몇 년 전 일이다. 퇴근 후 친한 동료들끼리 한 잔 하는 자리였다. 다들 술이 꽤 된 상태에서, 청일점이었던 남자 대리가 자기 친구들이 근처에 있는데 와도 되냐고 물었다. 우리는 흔쾌히 좋다고 했고, 잠시 후 몇 명의 친구들이 차례대로 합석하게 되었다.
그는 마지막에 도착한 사람이었다. 오기도 전에 친구들이 '법조계 인간'이라고 장난식으로 추켜세우는 인물이었다. 변호사였나, 검사였나. 어쨌든 그는 도착해서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서로 소개가 끝나자마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근데 안경 왜 껴요?"
생각지도 못한 상대방의 첫마디에 당황한 나. 그는 아랑곳 않고 글 맨 위에 언급한 말들을 계속 이어가며(또 쓰고 싶지 않다. 우웩.) 나에게 조언 아닌 조언을 퍼부었다.
안경은 나의 약점이다. 단순히 미용의 문제가 아니다. 정확히는 안경을 써야 하는 선천적, 후천적인 상황과 그에 수반되는 이런 식의 평가들이 괴롭다. 나는 안경을 꼈을 때와 벗었을 때의 이미지 차이가 커서, 살면서 안경을 안 쓰는 게 더 예쁘다는 얘길 종종 듣곤 했었다. 그래서 소개팅이든 결혼식이든 중요한 자리에서는 렌즈를 끼곤 했다. 렌즈의 촉촉함을 강조하는 어느 광고처럼, 뻑뻑한 내 눈에게 사과를 하면서.
안 그래도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오늘 처음 본 사람이 이렇게 무례하게 나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다니!
영화나 드라마였다면 '무슨 말씀이세요?!' 하며 상대방에게 바로 화를 내거나, '어머~ 거울은 보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하며 비꼬는 등 사이다를 날렸을 것이다. 혹은 요즘 트렌드인 그 책처럼, 우아하고 단호하게 '그만하시죠.'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무례한 사람에게 어정쩡하게 웃으며 대처했고, 고구마를 먹었다.
그가 남자였기 때문이었을까? 이 사건은 내 마음에 엉뚱하고 구체적인 불씨를 남겼다. 나는 그 이후로 소개팅에 렌즈를 끼고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소중한 내 눈을 희생해가며 그날 하루 상대에게 잘 보여도, 이후에 안경 낀 내 모습을 보고 저런 식으로 반응할 남자라면 아예 시작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좀 덜 예쁘면 어때, 이게 평소의 난데, 뭐 그런 마음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나는 한 남자와 연애를 시작했다.
그와 사귄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우리는 청담에 있는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데이트를 했다. 나는 모처럼 꽃단장을 하고 렌즈를 꼈다. 맛있는 요리들을 먹으며, 나는 그에게 물었다.
"나 안경 안 낀 게 더 낫지 않아? 계속 렌즈 꼈으면 좋겠어?"
그는 대답했다.
"둘 다 괜찮은데? 그리고 안경 낀 거 예뻐. 처음 만났을 때, 지적인 느낌이라 좋았거든."
그리고 몇 달 후, 그는 나를 본인의 단골 안경집에 데려갔다. 해외 유명 브랜드 안경 편집숍이자 연예인들도 가끔 오는 그 가게에서, 그는 생일선물이라며 나에게 린드버그 안경을 선물했다.
법조계 인간에게 무례한 말을 들었던 날, 나는 엄마의 조언처럼 그를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없었다. 그런 보살 같은 대응은, 남이 자신에게 낸 생채기를 아무렇지 않게 덮을 수 있을 만큼 마음이 넓고 멘탈이 강한 사람에게만 가능한 방식이었다. 지금까지도 그때의 일을 고이고이 기억하는 나 같은 소인배에게 그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단호하게 할 말을 하는 것도 힘들었다. 아무리 내가 논리적으로 맞는 소리를 해도 상대가 그걸 받아들일 지는 미지수였다. 설령 사과를 받는다 해도,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거나, 타인과 사이가 어색해지는 것도 내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식은, 이런 나를 온전히 받아들여주고 좋게 봐주는 사람들만 옆에 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억지로 스스로가 대인배가 되거나 단호박이 될 필요가 없었다. 가끔 사회에서 진상들을 만나도, 나를 공감해주고 인정해주는 그들의 진심이, 타인의 무례한 순간에 상처받은 나를 치유해줬다. 나에게는 그 방식만이 고구마 같은 상황에서 최선의 엔딩을 맞이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린드버그 안경을 선물한 그는 그렇게 내 남편이 되었고, 그 안경은 지금 안방 서랍장 속 안경 보관함에 고이 놓여 있다.